현금 사정 어려운데도 대출 줄여

서양 속담에 ‘은행원은 맑은 날 우산을 빌려주고 비올 때 우산을 뺏는다’라는 말이 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올 들어 7월까지 국내 은행 18곳 중 주요 시중은행을 비롯 11곳이 중소기업 신규대출을 줄여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조2000억 원이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부 소유의 우리은행과 KDB산업은행마저 중소기업 신규대출을 수천억 원씩 줄였다. 경기 침체 장기화로 현금 사정이 극도로 취약한 중소기업에 ‘비 오는데 우산을 빼앗는’ 대출 행태를 보인 것이다.

금융감독원이 최근 작성한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신한 국민 우리 하나 등 18개 은행이 올해 1∼7월 중소기업에 공급한 신규대출액은 11조900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5조1000억 원보다 3조2000억 원(21.1%) 급감했다.

은행별 신규대출 감소액은 신한은행 9000억 원, 한국씨티은행과 경남은행 각 6000억 원, SC은행 4000억 원 순이었다. NH농협은행은 지난해 1조2000억 원에 이어 올해도 9000억 원의 중소기업 대출을 회수했다.

특히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은행은 7000억 원, 산업은행은 5000억 원 신규대출이 감소했다. 경기 침체와 내수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을 위해 금융당국까지 나서 대출을 적극 독려했지만 사실상 국책은행이 오히려 정부 정책에 역행한 셈이다.

반면 국민은행은 이 기간 중소기업 대출을 1조4000억 원에서 1조9000억 원으로 5000억 원 늘렸고, IBK기업은행 역시 4조7000억 원에서 5조 원으로 3000억 원 증액했다.

은행들이 신규대출을 조이면서 올 들어 매출 부진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의 고통은 더 커지고 있다. IBK경제연구소가 307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금난을 겪고 있는 비율이 지난해 7월 28.4%에서 올 7월 30.2%로 높아졌다.

금융권에서는 올해 유럽 재정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서 은행들이 대출 손실의 위험을 낮추려고 대기업에 비해 부실 가능성이 큰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가계부채 문제가 부각되면서 개인 여신에 대한 리스크까지 높아져 은행들은 이중고(二重苦)를 겪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 은행들은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을 줄이는 동시에 담보대출 비중은 늘리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은행권의 신용대출 비중은 2008년 말 59.6%에서 올 7월 말 54.3%로 줄어든 반면 담보대출 비중은 같은 기간 30.3%에서 32.4%로 늘어났다. 대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담보자산이 부족한 중소기업에는 대출문턱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중소기업들은 매출 감소로 신음하고 있지만 많은 은행이 대출이 부실화되더라도 손실을 거의 보지 않는 담보대출을 늘리는 손쉬운 장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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