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미녀들의 추석 이야기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섯 명의 미녀가 모였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20~30대 여성이지만, 이들은 모두 ‘더 나은 삶’을 찾아 사선을 넘은 탈북자들이다. 자유 대한에 정착한 지 어느덧 5~10년이 됐지만, 이들은 추석이 되어도 고향에 갈 수 없다. 눈 감으면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다는 고향 이야기와 좌충우돌 남한사회 적응기를 전한다.

가수로, 연주자로, 리포터로, 강사로 활약중인 탈북 여성들. 왼쪽부터 임유경, 조미영, 명성희, 차영주, 서연주 씨.
가수로, 연주자로, 리포터로, 강사로 활약중인 탈북 여성들. 왼쪽부터 임유경, 조미영, 명성희, 차영주, 서연주 씨.

탈북자(공식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이나 독자의 이해를 위해 ‘탈북자’로 지칭) 2만 5천 명 시대, 그들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탈북자 출신 박사와 한의사·의사 등은 이제 희소가치가 사라질 정도로 그 수가 많아진 상태다.

뿐만이 아니다. 숨어 지내기에 급급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방송을 통해 자신의 끼와 재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상당수의 남성 팬을 확보하는 등 아이돌스타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탈북 여성들. 추석을 앞두고 이들을 만났다.

엄마 만나면 엿 사드리고 싶어요

“청진에 계신 엄마가 보고 싶어요. 만나면 엄마가 좋아하는 엿을 실컷 사드리고 싶은데….” 차영주(42) 씨는 ‘고향’에 대해 묻자 울컥하며 어머니 이야기부터 꺼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차씨는 홀로 탈북해 중국과 몽골을 거쳐 2004년 입국했다. 고향에는 현재 어머니와 두 동생이 살고 있다.

“제가 열아홉 살 때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세남매를 홀로 키우셨죠. 엿을 좋아했던 엄마는 ‘너 시집갈 때 엿이나 좀 사주고 가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곤 했죠. 그래서 그런지 엿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나요. 저도 엿을 좋아하지만 엄마 생각 때문에 엿을 먹지 못합니다.”

청진에서 전문학교 의상학과 교수로 근무했던 차씨는 현재 대중가수로 활동중이다. 그동안 ‘십년 만의 해후’ ‘여자는 그래요’ 등의 음반을 냈다. 가수 활동 틈틈이 공부해 교육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 초중고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고 있다. 아직 미혼이라 홀로 사는 그는 “추석이 되니 엄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며 “엄마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동창회는 없지만…

차씨는 목이 메어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고향 청진의 추석 풍경은 조미영(30) 씨가 대신 그려줬다.

“청진을 생각하면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도로가 먼저 떠올라요. 지붕에 갖가지 생선을 널어놓은 마을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청진은 참 예쁜 도시예요.”

조씨는 어머니와 함께 2002년 입국했다. 아버지와 오빠는 그보다 빠른 1999년에 들어왔다. 일가족이 모두 고향을 떠나온 셈. 그는 함경북도 도립예술단에서 성악배우로 활약했다. 한국에서는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해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라디오 방송에서 북한 소식을 전하는 리포터로 활약중이다.

“청진에서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섬유공장이나 제철소에서 일해요. 저는 군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아코디언을 배워 도립예술단에 들어갈 수 있었죠. 인민학교 예술소조(지도교사가 있는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서연주(28) 씨 역시 “고향 친구들이 보고 싶다”며 “한국에 와서 이곳 아이들이 가장 부러울 때는 동창회나 동문회에 간다고 했을 때”라고 말했다.

“학교 친구들이 그리워요. 다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너무 보고 싶어 새터민 쉼터에 ‘친구들을 찾는다’는 글을 남겨놓기도 했지만, 아직 한 명도 연락이 없네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서씨는 부모와 여동생과 함께 탈북해 2007년 입국했다. 탈북 당시 13세였던 그는 한국에서 초중고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한 후 현재 연세대 중문과 3학년에 다니고 있다. 회령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설가였고, 어머니는 보육원 교사였다.

“아주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청진에 간 적이 있어요. 회령에서 청진까지는 승용차로 3시간 거리였는데, 딴 세상이었습니다. 어린 제 눈에 비친 청진은 화려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곳이었죠. 서울이나 부산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함경북도 온성 출신의 임유경(28) 씨도 서씨처럼 어린 시절부터 청진을 동경했다. 그래서 인민학교 졸업 후 청진예술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춥고 배고픈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군 선전대에서 아코디언 연주자와 성악배우로 활동하다 부모를 따라 여동생과 함께 탈북한 후 2005년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탈북자 출신 여성그룹 ‘달래음악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출중한 아코디언 연주 실력 덕분에 미국 CNN과 영국 BBC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임씨는 현재 중앙대 연극영화과 2학년 휴학중이다. 그는 “연극영화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공을 음대 쪽으로 바꾸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과 일본서 팝페라 가수로 활동중인 명성희 씨. 라디오 방송 리포터로 활동중인 조미영 씨. 연세대 중문과 3학년에 재학중인 서연주 씨. 가수와 초중고 및 대학 강사로 활동중인 차영주 씨. 중앙대 연극영화과 휴학중인 임유경 씨.(왼쪽부터)
한국과 일본서 팝페라 가수로 활동중인 명성희 씨. 라디오 방송 리포터로 활동중인 조미영 씨. 연세대 중문과 3학년에 재학중인 서연주 씨. 가수와 초중고 및 대학 강사로 활동중인 차영주 씨. 중앙대 연극영화과 휴학중인 임유경 씨.(왼쪽부터)

일년 중 떡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

명성희(32) 씨는 다섯 명의 탈북 여성 중 출신 배경이 가장 화려하다. 그는 명동찬 전 북한축구대표팀 감독과 공훈배우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두 자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명동찬 감독은 1990년 평양과 서울에서 열린 통일축구대회 당시 북한대표팀을 이끌었고, 1992년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명성희 씨는 북한 예술가의 산실인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후에 영화와 드라마 OST 가수로 활동했다. 그는 북한 드라마 <엄마를 깨우지 마라>의 OST ‘스승과 제자’, <당찬 처녀들>의 OST ‘백두서정’을 불러 유명해졌다. 두 작품은 국립중앙도서관과 MBC방송사 자료실에 복사본이 보관돼 있어 그가 활동할 당시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명동찬 감독은 지난 1999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세 식구는 북한을 떠나 2005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상위 1%에 속했던 그의 가족이 탈북한 이유는 “세계적인 가수의 꿈을 이루고 싶어서”라고 한다.

한국에 와서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명씨는 현재 팝페라 가수로 활동중이다. 그는 “추석과 우리 가족은 묘한 인연이 있다”며 평양에서 보낸 추석을 추억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우리 가족이 북한을 떠나온 것도 추석 무렵입니다. 추석이 되면 부모님께서는 성묘를 위해 아버지 고향인 영변에 다녀오곤 했어요. 승용차 가득 친척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싣느라 우리 자매가 탈 자리는 없었죠.”

북한에서도 추석은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명절이다. 사는 형편이나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개 추석 당일 아침에는 간단한 차례 음식을 준비해 성묘하고, 오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공을 차거나 민속놀이를 하며 보낸다.

조미영 씨는 “일년 중 떡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 추석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칠 정도로 설레던 기억이 난다”고 했고, 임유경 씨는 “아침에 성묘하고 오후에 노래방에서 계몽가요인 ‘찔레꽃’ ‘홍도야 우지 마라’ 등을 부르며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남한의 모든 도로가 유리로 돼 있다?

이들 역시 추석이 되면 우리와 다르지 않게 송편을 빚어 고향의 맛을 음미한다. 식구들이 모여 마음껏 웃고 떠들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다. 어느덧 수다 삼매경에 빠진 이들에게 “탈북 후 힘든 일이 뭐였는지” 묻자 남한사회 적응 초기에 겪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살던 청진에는 밀수로 들어온 남조선 물건이 많았고 인기가 좋았습니다. 주민 사이에 ‘남조선이 잘산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 ‘남조선은 모든 도로가 유리로 돼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어요. 탈북 후 인천공항에 도착해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남조선 도로는 정말로 유리로 되어 있나 보다’라고 착각했습니다. 달리는 버스가 가는지 안 가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부드러웠거든요.”(조미영)

“저는 북한에 있을 때 몰래 남한 드라마를 자주 봤어요. 주로 재벌 2세인 실장이나 본부장이 가난한 여자와 결혼하는 이야기여서 저도 남한에 가면 잘생긴 재벌 2세와 결혼하는 줄 알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그 기대를 버리지 않았어요. 잘생긴 직원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를 친절하게 챙겨주었으니까요. 드라마의 허상은 곧 여지없이 깨졌습니다.”(임유경)

“남한에 온 후 외래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혼동해 길을 묻는 분에게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 적이 있습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어떤 분이 길을 묻기에 ‘저쪽으로 30미터쯤 걸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된다’고 알려줬더니 잠시 후 그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서는 ‘저쪽으로는 아무리 가도 에스컬레이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때야 ‘엘리베이터를 에스컬레이터라고 잘못 알려줬구나’ 싶어 얼마나 미안하던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중도(중앙도서관)’ ‘학관(학생회관)’ 식의 줄임말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어요.”(서연주)

“앞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저마다 품어온 꿈과 소원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였다. 라디오방송 리포터로 활약중인 조미영 씨는 “대학에 진학해 언론학을 전공한 후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북한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고, 대학에 재학중인 서연주 씨는 “졸업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팝페라 가수로 활동중인 명성희 씨는 “크고 작은 행사에 초청받을 때마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른다”며 “남북 평화통일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북에 두고 온 차영주 씨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 내 고향 청진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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