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현금성 자산과 사내보유금이 크게 늘어나 기업의 투자심리가 위축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내년에도 투자심리가 여전히 좋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며 기업의 투자가 원활하지 못하면 국내 경기 회복도 느려질 것으로 진단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와 한국거래소는 16일 국내 유가증권과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법인 1591곳의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올해 3분기말 기준 64조2636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59조2917억원)보다 8.4%(4조9717억원) 늘어났다고 밝혔다.

현금성 자산은 특히 유가증권시장을 중심으로 3분기 들어 급증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말 유가증권시장 12월 결산법인 633개사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51조5645억원으로 지난해 말과 비교해 5.4%가량 줄었다.

하지만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유가증권시장 655개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작년 3분기와 올해 3분기(55조9585억원) 사이 오히려 6.3% 증가해 최근 들어 급증했음을 보여줬다.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통화 외에도 통화대용증권, 당좌예금, 보통예금처럼 비교적 빠르고 쉽게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산을 의미한다.

기업이 설비투자나 연구개발에 돈을 쓰는 대신 현금 보유량을 늘렸다는 것은 기업이 경영환경이나 사업전망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코스닥 시장에 비해 대형기업이 많은 유가증권시장 상장 기업의 현금 보유가 늘었다는 것은 중소기업뿐 아니라 대기업의 투자 심리도 위축됐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국내에서 자산규모 1위인 삼성전자의 3분기말 현금성 자산(3조6958억원)은 작년말과 비교해 2배가량으로 급증했다.

반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시설투자는 1분기 7조8000억원에서 2분기 6조2천억원, 3분기 4조5000억원으로 하락세를 그려왔다. 3분기 투자액은 10분기만에 최소수준이다.

기업의 투자심리 위축은 사내 유보금 증가로도 확인된다.

조사대상 1644개사의 3분기 말 현재 내부유보금 총액은 823조3536억원으로, 작년 같은 시기 773조3475억원보다 50조원가량(6.5%) 증가했다.

내부 유보금은 이익잉여금 중 주주들에게 배당하지 않은 돈이다.

기업들은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는 배당금마저 아껴 현금으로 쌓아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며 기업들이 불확실성에 대비한 보수 경영에 들어가면서 현금성 자산이 증가하는 것으로 진단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겪었던 학습효과가 되살아나면서 위기에 대비해 ‘현금이 최고’라는 인식이 커지자 기존에 계획했던 투자를 거둬들이고 신규 투자는 검토조차 않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신한금융투자 이성권 연구원은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2.2% 정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과거 4~5%대에서 멀어지게 된 게 기업의 투자심리를 위축시키고 있다”며 “최근 설비투자 관련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내년에도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수출 호조와 내수 진작 등 경기 회복 신호가 있어야 기업이 고용을 확대시키고 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설명했다.

우리투자증권 유익선 연구원은 “올해 상반기에 설비투자 집행을 했고 하반기부터 둔화되기 시작했다”며 “내년에도 설비투자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내수와 수출 등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며 “특히 대기업은 올해보다 내년 설비투자 규모를 더 작게 계획하고 있어 내년 상반기까지는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연말을 앞두고 대선과 주요국의 정권교체 등 정치이벤트로 기업 경영이 불확실해질 수 있다는 점도 기업들의 현금 수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풀이된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정치이벤트에 따라 경제정책이 바뀌기 때문에 기업들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경제정책에 따라 투자계획과 투자규모도 바뀌는 만큼 경기가 회복되기 전까지 본격적인 투자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설비투자가 위축되면 국내 경제 회복속도도 그만큼 더뎌질 것으로 분석했다.

신한금융투자 이성권 연구원은 “설비투자는 기업의 고용과 직결돼 있다”며 “요즘 정치권에서 일자리 확대 이야기가 나오지만 기업이 투자를 안 하면 고용지표도 개선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우리투자증권 유익선 연구원도 “설비투자가 활성화돼야 고용 창출에서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가능하게 되는데 최근 기업들이 투자는 뒷전이고 현금만 쌓아두려는 경향이 있어 경기회복이 지연될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