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2역 사기극…남녀 의사 행세하며 금품 갈취



인천에 사는 A(26·여)씨는 지난해 11월 중순께 휴대전화 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한 여의사를 알게 됐다.

여의사가 A씨의 글에 먼저 댓글을 달면서 둘의 교류는 시작됐고, 어느새 틈날 때마다 쪽지를 주고받으며 언니-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고 또 같은 또래라 더 쉽게 친근감을 느꼈다.

A씨는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던 언니와 휴대전화 번호도 교환했다. 이후 둘은 카카오톡으로 매일같이 일상을 공유하며 급격히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A씨에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남자 선배를 소개해주겠다며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언니가 설명한 남자는 교사 출신의 부모님 밑에서 자란 번듯한 의사. 게다가 형은 검사라니 모든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A씨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언니는 “밑져야 본전이니 편하게 만나보라”며 마음을 부추겼다.

이윽고 같은 달 28일 인천의 한 호프집에서 결국 단둘이 만났다. A씨는 애초에 마음을 비운 채 나간 자리였고, 남자가 의사라고 잘난 체 하면 곧장 집으로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남자는 마음에 드는 외모는 아니었으나 심성이 곧고 착해보였다. 많은 대화를 나눴고 서로 깊은 지점까지 통하게 됐다.

남자는 만난 지 4일 만에 A씨에게 ‘사귀자’고 고백했다. 소개를 주선한 언니는 카카오톡으로 ‘착하지 않더냐. 선배가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던데 계속 만나보라’며 부추겼다. 남자도 “직업은 신경 쓰지마. 서로 좋아하면 되는 거야”라며 A씨를 배려했다.

남자에게서 진심을 느낀 A씨는 만난 지 4일 만에 그와 연인이 됐다. 이토록 배려심 많은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A씨는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깐. 사귄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남자는 돈타령을 해댔다. 핑계도 그럴싸했다. 갑자기 지갑을 잃어버려 돈을 꿔달라고 했다. 이유는 박사논문이 표절시비에 휘말려 병원 교수들에게 접대를 해야 한다는 것.

병원 사정을 잘 모르는 A씨는 믿었던 남자에게 순순히 돈을 빌려줬다. 그러나 남자는 그날뿐 아니라 계속해서 비슷한 핑계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10여 차례 동안 무려 300여만원을 빌려갔다. 적게는 10만원, 많을 때는 90만원까지 빌렸다.

A씨도 넉넉한 사정은 아니었다. 심지어 친구에게 돈을 꿔 빌려주기까지 했다. 곧 갚겠다는 남자는 말만 그럴 뿐 정작 통장으로 돈이 입금된 적은 없었다.

어느 날부터는 전화 연락도 잘 닿지 않았다. A씨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자 남자를 소개해준 언니에게 연락했다.

언니는 ‘선배 요즘 바쁘다’며 ‘네가 이해해줘’라고 말하며 A씨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전화로 속마음을 털어놓고자 걸면 언니는 늘 받지 않았다. 오직 카카오톡으로만 대답을 했다.

생각해보니 정작 언니와는 통화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선배가 췌장암 3기 확정 받았다’고 충격적인 소식을 알려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고 걱정 말라며 오히려 울먹이는 A씨를 위로했다. A씨는 걱정이 앞서면서도 어른스러운 남자가 대견해 보였다. 꼭 나아서 결혼하자고 약속도 했다.

그렇게 둘의 사랑도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순탄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12월 31일. 날짜를 한참 지났는데도 생리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임신이었다.

A씨는 당혹스러움에 언니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언니는 위로나 축하보단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임신은 여자들 잘못이라는 것. 정말 임신이 여자만의 잘못이라는 건가.

반대로 남자는 들뜬 목소리로 임신 사실을 기뻐해줬고 돼지꿈을 꿨다며 너스레까지 떨면서 A씨를 안심시켰다. A씨도 그 모습에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게 남자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임신 소식을 전한 뒤 새해 첫날부터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3일 뒤엔 언니도 카카오톡을 수신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 됐어.’ 이상하다고 생각한 A씨는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한다던 병원에 전화를 걸었고 ‘그런 의사가 없다’는 믿기 힘든 대답을 들었다.

A씨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친구의 휴대전화를 빌려 두 사람에게 동시에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받지 않았고 언니는 통화 중이었다. 남자에게 걸었던 전화를 끊자 언니의 휴대전화 연결 신호음이 들렸다.

남자가 통신회사의 '투넘버 서비스'를 이용, 1개의 휴대전화에 2개의 다른 전화번호를 등록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A씨도 예전에 이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있어 쉽게 알 수 있었다.

결국 언니와 남자가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여의사 행세를 했던 언니와 선배라는 남자 모두 가짜 의사였다. 생각해보니 남자는 병원 일 핑계로 오후 6시 이후에만 연락이 가능했고, 언니는 주로 낮에만 대화를 나눴다.

A씨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지난 21일 사기 혐의로 예전 남자친구에 대한 수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인천 연수경찰서에 제출했다.

하지만 남자가 A씨에게 알려준 이름과 나이 등 모든 신상정보가 거짓이어서 고소장은 제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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