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와 행복연구소장/ 교육학박사 고영기

가정은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곳으로서 원초적 공동체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 구성원이 돼 살아가다 또 다른 가정을 만들어 대를 이어 갑니다. 인류의 영속성도 바로 여기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전 지구적으로 가족은 위기에 봉착하여 있습니다. 가정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가정 붕괴와 가족 해체의 속도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삶의 여건이 너무 각박하고 가정과 가족이 무너지니 학교·직장·사회·국가가 온전할 리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가정과 가족 위기의 원인과 양상은 다양합니다. 양극화 심화에 따르는 경제적 기반 붕괴, 불륜의 일상화 등 가족 구성원간의 신뢰의 붕괴, 부모·자녀간 세대의 단절도 어느 때보다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상처받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지친 모습으로 가정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효(孝)를 배우고 실천하는 가정은 에너지 재생산의 공간이어야 하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신체적·정신적으로 아픔이 있을때 치유의 힘과 능력을 스스로 자신안에서 발견하고 활용하는 장소이어야 하는데도 그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은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알기에 바깥에서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서로가 의사가 되어 서로를 치유해 주는 곳이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많이 안다는 이유로....무심코 던진 하찮은 말과 행동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안겨주곤 합니다.
  
가정은 상처와 아픔을 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치유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우리 가족에게 훌륭한 의사의 역할을 하였는지, 조그만 노력이라도 하였는지 되돌아 보는 매일 매일이 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가정의 역할이 중요함에도 재혼가정이 급증하면서 복합가족의 힘겨운 일상도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로 가족이라는 집단의 재생산 구조마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화는 너무 빠르고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1인 가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으며, 군중속의 고독과 풍요속의 빈곤이 흔해졌습니다.  특히 노인 수발의 자족 시스템이 붕괴한 지는 이미 오래되어 ‘노인자살(老人自殺)’과 ‘노인 독거사(老人 獨居死)’ 문제도 큰 사회적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2013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는 2026년 경이면 초고령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나라에서 노인 자살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면서 이미 초고령 사회로 접어든 충남·전남의 시·군 5곳을 취재한 결과 노인자살 문제가 지역사회의 고민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자살예방협회 하규섭(분당서울대병원 정신과 교수) 회장은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고 배우자마저 먼저 죽고 나면 고독감이 클 수밖에 없다”며 “여기에다 노환까지 겹치면 외로움이 극대화돼 자살을 결심할 개연성이 커진다”고 설명한 인터뷰 기사도 게제 하였습니다.
  
또한 ‘황혼의 고독’ 즉 노년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노인이 늘고 있다면서 통계청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자살자는 2001년 1,448명에서 2011년 4,406명으로 10년 사이 세 배로 증가했는데 이는 하루 평균 12명의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얘기라면서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며 2009년 OECD가 조사한 65~74세 노인 자살률(10만 명당 자살자)에서 한국은 81.8명으로 1위였고 미국(14.1명)의 5배, 영국(4.8명)의 20배나 된다는 사실도 보도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독거노인이 늘어나 이웃에서 죽은 사실조차 모르는‘노인 독거사(老人 獨居死)’도 늘어나고 있다면서, 그 이유는 자식이 있더라도 돌보지 않거나 가족 없이 홀로 지내는 노인들은 깊은 고독감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하면서, 독거노인은 2000년 54만 3,522명에서 2010년 105만 5,650명으로 10년 사이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면서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께 독거노인 가구 비율은 전체인구의 10.3%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면서 이는 열 집당 한 집은 독거노인이라는 얘기인데 독거노인이 늘어나면 돌보는 사람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노인 독거사(老人 獨居死)’가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도 밝혔습니다.
  
위와 같은 ‘노인자살’과 ‘노인 독거사’의 사회적 문제에 당면한 우리에게 아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어린 봉이 소년의 할아버지에 대한 효(孝)와 지혜가 불효하는 부모님을 크게 깨우치게 한 이야기로 시공(時空)을 초월한 진리로써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옛날 어느 고을에 총명하고 마음씨 착한 봉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봉이의 부모님은 몹시 게으른 농사꾼이었습니다. 가진것도 넉넉하지 못한데다 모든 일에 게으르고 보니, 집안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소년의 어머니는 마음씨가 곱지 않아서 몸져 누운 시아버지를 여간 구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며느리는 그렇더라도 아들이 효성스러우면 좋으련만, 이 게을러 빠진 농부는 뭐든지 자기 부인의 말을 따르는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봉이 소년은 그런 부모님이 못마땅 했습니다. 그리고, 앓아 누운 할아버지가 불쌍하여 늘 할아버지 곁에서 알뜰살뜰 보살펴 드렸습니다. 저녁 때가 되면 봉이는 자진해서 할아버지 방의 군불을 땠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방이 더울 만큼 때지 않고 시늉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녀석아, 웬 나무를 그렇게 처때는 거냐?” 군불 때는 봉이에게 어머니가 소리 치면, 봉이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이 나무는 제가 지난 가을에 할아버지 군불감으로 따로 해다가 말린 거예요.”

그 뿐만 아니라, 소년은 늘 군불 속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웠다가 몰래 할아버지께 드렸습니다. 밤에 소년이 군 감자나 고구마를 가지고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면, 저녁을 변변치 않게 먹은 할아버지는 여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소년의 할아버지는 너무 늙은 데다 몸까지 건강치 못한지라, 먹을 것을 보면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밤이 깊도록 할아버지 방에서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말동무를 해드리던 봉이는, 할아버지가 잠이 드신 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안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거예요?” “이렇게 지내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봉이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아버님 말예요. 언제까지 이렇게 병든 아버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느냐 말예요.” 봉이 어머니는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 붙였습니다.
    
“그러니, 낸들 어쩌겠소. 돈이 있어야 아버님 병을 고쳐드리지” “누가 병을 고쳐드리자고 이러는 줄 아세요? 왜 여태 안 돌아가시냐는 거예요”“아, 사람의 목숨을 누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우리가 참아야지”“나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병든 어른 모시는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이러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어요”“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그리고, 아버님 시중은 봉이 녀석에게  맡기면 되지 않소.”
    
“나는 그게 더 속이 상해요. 봉이는 우리 아들인데, 그 녀석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 어미 아비보다는 할아버지한테 더성이니 말예요. 이제 우리도 아들의 효도를 받을 때가 되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봉이를 아버님 시중이나 들게 해야 하지요? 나는 더 이상 그 꼴은 못 보겠어요”“그렇지만 어쩌겠소. 아무튼 돌아가실 때까지는 모셔야 되지 않겠소”

봉이는 어미와 아버지가 나누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더욱 할아버지가 불쌍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은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습니다. “여보, 내게 한 가지 생각이 있어요. 당신 내일 아버님을 지게에 지고 산에다 버리고 오세요.”“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아무리 모시기가 귀찮다해도 어찌 그런 생각을...”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예요. 당신 고려장이란 말도 못 들어봤어요? 늙은 노인을 산에다 버리는 것은 예부터 있어 온 풍습이라고요.“하긴 그렇구려. 하지만, 아버님께 뭐라고 해야 하지?”“아버님은 먹을 것을 드린다면 어디라도 따라가실 거예요.             정신이 없는 노인이니까요”“그, 그렇긴 하지만...” “여보, 꼭 그렇게 하세요. 난 이대로는 더 이상 못 살아요.”

부모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밖에서 듣고 있던 봉이는 너무나 놀랍고 슬펐습니다. 그날 밤 봉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이면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대로 할아버지를 산에다 버리고 올 것이 뻔했습니다. 봉이는 할아버지가 가엾어서 눈물이 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기르실 때는 얼마나 귀여워 하셨을까, 얼마나 소중한 자식으로 생각하셨을까를 생각하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봉이는 문득 한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옳지, 그 방법을 써야겠군.”

봉이는 혼자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봉이의 어머니는 그래도 양심이 조금 남아 있었던지 할아버지의 진지상을 다른 날보다 잘 차렸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 웬일로 생선 도막이 다 상에 올랐구나!” 할아버지는 밥상 곁에 앉아서 가시를 발라드리는 봉이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오늘부터는 아버지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더욱 잘 모시려나 봐요” “흐음, 그래야지. 이제 철들이 드는 모양이야.아침 식사가 끝나자 봉이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새 옷을 입으니까 기분이 좋구나. 봉아, 네 말대로 이제부터 아비 에미가 나를 잘 돌보려나보다. 고마운 일이지, 고마운 일이야.” 할아버지는 싱글벙글했습니다.
    
“아버님, 제가 모처럼 산에 모시고 가서 맛있는 실과를 따드릴 테니 지게에 앉으시지요.” 마침내 아버지가 지게를 가져와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기뻐하며 지게 위에 앉았습니다.
   
“아버지, 저도 같이 가겠어요.” 봉이는 놓칠세라 따라 나섰습니다.  “넌 집에 있거라” “봉아, 내가 찰떡을 만들어 줄테니 너는 집에 있거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렸지만 봉이는 한사코  할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우겼습니다. 아버지는 할 수  없다는 듯 봉이를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산으로 가는 도중, 할아버지는 지게 위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봉이 아버지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봉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할아버지는 너무 오래 사셨어. 네 어머니와 나는 더 이상 할아버지를 모시기가 힘이 드는구나. 그래서, 오늘은 할아버지를 산 속에다 버리러 가는 길이다. 알겠니?”

“예, 알겠어요. 정 모시기 힘드시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봉이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정들었던 봉이인지라, 그런 말을 들으면 몹시 놀라고 가슴 아파하리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봉이의 태도는 침착했던 것이지요.
“네가 부모를 이해해 주는 것을 보니 참으로 다 컸구나!”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드디어, 산 속 깊은 곳에서 아늑한 장소를 발견했습니다.“저 바위 아래가 좋겠군.” 아버지는 중얼거리며 그곳에다 지게를 내려 놓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지게 위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잠든 것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재빨리 그곳을 떠나려 했습니다.
    
“아버지, 저 지게는 가져가야지요” “아니다. 지게에서 내려놓으면 할아버지가 깨실지도 모르니 우리는 그냥 내려가는 게 좋겠다.” 아버지는 봉이의 팔을 끌었습니다. “안 돼요, 아버지. 저 지게를 꼭 가져가야 해요” 봉이는 고집스럽게 버텼습니다.“아니, 왜 꼭 지게를 가져가겠다는 거냐?” 아버지가   짜증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당연하잖아요? 이 다음에 아버지 어머니가 늙고 병들면 저도 산에다 버릴 때 이 지게를 쓰겠어요” 봉이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나도 언젠가는 늙고 병드는 날이 있겠지. 그러면, 우리 봉이 녀석이 나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아버님,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지금까지 아버님을 잘 모시지도 못하고, 더구나 이 산속에다 아버님을 버리려 했으니 저는 참으로 몹쓸 자식이었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정말 잘 모시겠습니다”

아버지는 잠든 할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음씨 곱고 지혜로운 봉이 덕분에 자신의 불효를 깨닫게 된 아버지는 그 뒤 누구보다도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가 되었습니다. 봉이가 한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도 역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참으로 효성스러운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위 이야기는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으면서 어찌 자식이 나에게 효도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했던 옛 성인의 가르침을 어린 아들을 통하여 비로소 깨닫게 된 봉이 부모님 이야기로써, 어리지만 마음씨 곱고 착한 봉이의 지혜와 효심(孝心)이 있었기에 부모님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게 되어 효(孝)가 충만한 행복한 가정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덧 예전보다 크게 나아진 경제적·문화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노인 자살이 늘어나고, 독거노인의 죽음이 늘어나는 것은 물질적·외형적 가치만으로는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간생명의 소중함과 가정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우리만의 독특한 효(孝)문화의 가치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는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때론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져 산다는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울하고 고통을 느끼는 순간 주위의 누군가에게‘나 지금 외롭고 힘들어 죽겠다. 너무 괴롭고 가슴이 아파 죽겠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말을 경청해 주고 위로해 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물질이 부족하더라도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살같은 극단적인 생각은 떠오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재물을 물려주는 것보다 형제간에 화합과 자손을 반듯하게 잘 가르쳐 집안의 가풍을 아름답게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식은 부모의 뜻을 이어받아 가풍을 아름답고 융성하게 하려면 부모에 대한 효도(孝道)보다 더 큰 가치는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손들이 대대(代代)로 내려가면서 자신과 조상의 뜻을 받들어 가리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믿음이 무너져 자식도 제 뜻대로 살 것인데, 하물며 손자나 그 다음 대(代)로 내려가면 조상의 뜻을 생각해보기라도 할지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손자는 커녕 자식도 부모 뜻을 이어주리라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과연 오늘날의 우리 가정과 사회·국가가 과거보다 더 평안하고 행복하게 되었는가요?
  
이는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도입과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가족형태가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제도로 변하면서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쓰려 물질적 풍요에만 너무 치우친 나머지 계속 욕심을 키워나가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美風良俗)인 효(孝)를 잊고 살아 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도 조상과 부모의 뜻을 생각하면서 우리만의 효(孝)문화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을 다시 한 번 강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가장 큰 효도는 조상과 부모의 아름다운 뜻과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로 인해 가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가정을 바탕으로 사회와 나라가 만들어지고, 세상이 존재합니다. 가정은 사회의 주축·나라의 뿌리·세상의 핵심입니다. 그 가정을 지키는 기본조건은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효도입니다. 즉 사랑과 효도는 가정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라 한 바퀴라도 고장나면 수레는 안갑니다.

사랑과 효도(孝道)가 가득찬 가정이 되어 수레의 두 바퀴가 잘 굴러가면 세계 1위라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노인자살(老人自殺)’과 ‘노인 독거사(老人 獨居死)’ 문제도 점차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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