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와 행복연구소장/교육학박사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 1732-1799)’은 미국의 독립과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버지니아주 출생으로 미국의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헌법제정회의에서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연방정부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세계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직접 참여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과 헌법의 실현 등에 힘써 재임기간(1789-1797년)동안 신생 미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한쪽에 치우치거나 독단적이지 않았고, 주위의 의견을 듣고 포용할 줄 알았으며, 정직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정의와 조화를 갖춘 굳센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명석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초기 미국을 이끌면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건국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려지고 있다.

세계 최초로 국민이 직접 뽑은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

1789년 4월 30일 뉴욕에 있는 미국 임시정부의 청사 페더럴 홀(Federal Hall)에서 미국 헌법에 의하여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워싱턴’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초대 대통령 당선자 ‘조지 워싱턴’이 오른손을 성경 위에 올려놓았다. 뉴욕 재판소장 로버트 리빙스턴이 물었다. “당신은 미국의 대통령직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미국의 헌법과 국민의 권리를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까?” ‘조지 워싱턴’은 대답했다. “예, 엄숙히 맹세합니다.”

‘조지 워싱턴’대통령의 취임식이 세계 역사상 각별한 의미가 있는데는 혈연에 따른 왕권 세습이 아닌 세계 최초로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가 임기가 정해져 있는 국가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민주적 공화정이 실시된 적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취임식이야말로 대통령 중심제로 대표되는 현대 민주정치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 대포와 총 앞에서는 의연했던 ‘조지 워싱턴’장군이었지만 취임 연설을 하면서는 어느 때보다 떨고 있었고, 연설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의 부름을 처음 받았을 때,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불빛 앞에서 나는 나의 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불빛은 나에게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 이에 나의 개인적 보수는 사절하겠습니다. 업무상 따르는 비용도 공익을 위해 꼭 필요한 실질 경비로 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구상에서 대통령제를 처음 도입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나라를 새로 세우면서 채택한 제도였다. 따라서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1789년 이전에는 지구상에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아예 없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에서와 달리 혈연에 따른 세습이 아니라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국정을 이끌어갈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조지 워싱턴’대통령의 역할은 막중했는데 그 이유는 미합중국 헌법에 따라 최초로 실시되는 대통령 중심제의 대의민주주의가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지 워싱턴’이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했다면 자칫 대통령제의 실패로 간주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됐다면 차라리 종래의 군주왕정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어린 시절과 항상 배우는 자세와 노력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 났음에도 어린 시절의 ‘조지 워싱턴’은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Augustine Washington : 1694-1743)’은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난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두 번째 부인 ‘메리 볼(Mary Ball : 1708-1789)’과 재혼하였다. ‘어거스틴 워싱턴’과 ‘메리 볼’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조지 워싱턴’은 그중 장남이었으며 ‘조지 워싱턴’은 11세 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정도에서 그쳤다.

당시 버지니아주의 다른 귀족들의 자녀는 영국은 물론 유럽에 유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조지 워싱턴’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장남인 관계로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린시절부터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근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알았기에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정진하여 자신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항상 배우는 자세로 실력을 키운 사람이었다.

또한 정직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강한 책임감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어린 시절에 병정놀이를 즐겼다고 하는데 항상 지휘관을 맡았으며 그는 모든 운동을 좋아했고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중재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래 이야기는 “‘조지 워싱턴’과 벚나무 이야기”로 ‘조지 워싱턴’이 어린 시절때의 정직성과 용기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 ‘조지 워싱턴’에게 아버지가 도끼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근데 그 도끼로‘조지 워싱턴’이 아버지가 평소 애지중지하던 벚나무를 베어 버렸습니다.이를 알게된 아버지가 벚나무를 누가 이렇게 한거냐고 화를 냈는데,‘조지 워싱턴’이 거짓말하지 않고 자신이 그랬다고 솔직히 말하자 아버지가  ‘조지 워싱턴’에게 ‘오늘 나는 벚나무 한그루를 잃었지만, 대신 정직한 아들을 얻었구나‘라며 안아줍니다.“
  
우리는 보통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때, 꾸중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칭찬과 격려하는 부모가 될 때 자라는 아이는 ‘정직은 항상 최고다’라는 마음으로 용기있게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책임과 겸손, 용기와 정직으로 독립군 총사령관에서 대통령 선출까지
  
‘조지 워싱턴’은 20세 때인 1752년 영국군에 입대하여 특유의 성실함으로 성공적인 군인이 되었으며,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ts.) 서쪽의 땅이 프랑스인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반대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국 정규군이 될 수 없었다. 좌절한 워싱턴은 1758년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 전쟁 경험은 후일 독립군 총사령관이 될 자질을 닦은 훌륭한 기간이었다.
  
젊은 시절 ‘조지 워싱턴’의 인생 목표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었으며, 그러기 위해 그는 늘 배우며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군인의 길을 포기한 ‘조지 워싱턴’은 정치에 도전했고, 그는 1759년 버지니아주의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였다.

버지니아주 의회의원으로서 1765년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원을 지지하여 인지조례(印紙條例: 일명 ‘Stamp Act’로써 1765년 영국이 미국 식민지에서 강제적으로 실시한 최초의 과세법. 각종 증서·증권류에서부터 신문·광고·달력 등에 이르는 인쇄물에 인지를 붙일 것을 요구한 것이며, 그 수입으로 미국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유지비에 충당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의 반대를 관철시켰으며, 1769년 ‘타운젠드 諸法’(‘Townshend Acts’ : 1767년 영국의회가 제정한 일련의 법률이며 종이 ·유리 ·차(茶) 등에 대한 수입세의 신설, 그 징수를 위한 세관의 설치 등을 정한 것으로서, 당시 영국의 재무장관인 타운젠드가 제안하였다.

미국 식민지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1770년 차세(茶稅)만 남기고 철폐되었으나, 이 차세에 대한 반대운동이 계속되어 미국 독립운동의 유인(誘因)이 되었다.)을 반대하다 의회가 해산당하게 되자 영국상품 불매동맹을 결성하였다. 1774년 제1차 대륙회의(大陸會議: 일명 ‘Continental Congress’로써 미국 13주 식민지의 대표자회의이다. 미국 독립혁명 시기에 미국 13주 식민지의 통일적 행동을 군사 ·외교 ·재정에 걸쳐 지도한 기관으로, 대륙이라는 말은 각 주 의회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한 말이다.

1774년 영국의회가 제정한 ‘참을 수 없는 법’에 대항하기 위해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요청에 따라 9월 5일 제1차 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열고, 대표 55명은 영국(英國)의 압제로부터 식민지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할 것과 영국과의 통상단절을 결의한 뒤 10월 26일에 해산하였는데, 제1차 회의에서는 독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에, 1775년 제2차 대륙회의(제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 10일부터 개최되었는데, 이미 시작된 영국과의 무력충돌에 대처하는 지도기관으로서 군대조직 ·통화발행 등을 결의하고 ‘조지 워싱턴’을 식민지 총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평화의 청원’을 영국에 보냈다. 그러나 영국의 태도가 강경하였으므로,

급진파 사이에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76년 7월 2일 독립선언문을 채택, 7월 4일 공포하였다. 1777년 11월 미합중국 초기헌법이라 할 수 있는 연합규약(聯合規約)을 기초하였으며, 81년 이후 연합의회(聯合議會)로 개칭, 독립전쟁을 지도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1787년 서북(西北) 토지법 등을 제정하였고, 89년 연방헌법 제정으로 신정부가 수립되자 해체되었다.)에 버지니아주 대표로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책임있고, 겸손하고, 용기있고, 정직한 ‘조지 워싱턴’은 회의대표들의 만장일치로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총사령관에 임명된 ‘조지 워싱턴’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 임명을 거절하는 것은 내 힘 밖의 일입니다. 이 임명의 거절은 나 자신에게는 불명예를 의미하는 것이고 내 친구들에게는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독립군 총사령관이 된다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게 큰 책임감을 가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조지 워싱턴’ 개인에게 있어서도 모든 것을 거는 행동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이 일에 자신의 생명, 가족의 생명, 자신의 땅, 그리고 모든 재산을 걸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정당한 대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걸고 이 일을 수행하려고 했다.
  
독립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후 ‘조지 워싱턴’은 훈련 받지 못한 군인들과, 무기와 군수물품의 태부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세계 최강의 영국군에 맞서야 했다.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은 ‘조지 워싱턴’은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준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싸우십시오.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전은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십니다.” 독립전쟁 초기의 ‘조지 워싱턴’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당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국가로 잘 훈련된 정예군과 강력한 재정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은 단지 영국에서 5,000km 떨어져 있다는 사실 외엔 유리한 점이 없었다. 쓸 만한 군함도, 훈련된 병사도, 넉넉한 재정도 없었다. 그 무엇보다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이 미국인의 2/3가 되었으며, ‘조지 워싱턴’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머지 1/3을 이끌고 독립전쟁을 치러야만 하여 전혀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보다 자신의 군대와 더 힘겨운 싸움을 하였다. 장기간의 전쟁과 패전이 계속되자 군인들은 도망을 갔고, 밀린 봉급 투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아예 전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본국에서 5,000km 떨어져 있어 물자보급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렵다는 영국군의 약점을 이용하면서 깊이 숨어서 영국군과의 전투를 가급적 피하면서 시간을 끌며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

수 많은 패전과 많은 어려움에도 직면했지만, 그때마다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용기로 이를 극복하고 결정적인 세 번의 전투승리로 마침내 미국 독립을 쟁취하였다. 
   
177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갑자기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렌턴’ 요새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1977년 9월 19일 ‘새러토가’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이 두 번의 대승은 결국 프랑스 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지원도 이끌어 냈다.

1781년 10월 9일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 미국 독립혁명 전쟁의 결말을 지은 결정적인 싸움. 1781년 ‘찰스 콘월리스’가 지휘하는 영국군이 뉴욕으로부터의 지원군 및 해상으로부터의 함대의 원조를 기대하여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으로 물러났을 때, ‘조지 워싱턴’의 식민지군은 육상에서 이를 포위하고 해상에서는 프랑스함대가 출격하여 영국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식민지군이 승리했다.

이와 같이 식민지군의 군사적 승리를 확정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싸움이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 1738-1805)’가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783년 ‘파리 강화조약’(1783년 9월 3일 미국 독립전쟁을 종결시켰던 강화조약. 이 조약으로 영국은 미국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였으며, 그 영토로 캐나다와 플로리다를 제외한 미시시피강 이동(以東)의 땅을 인정하였다.)이 체결되자 군의 통수권을 ‘연합회의’에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흔히 막노동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혹은 차림새가 초라하다거나, 몸에 걸친 의복이 남루하다고 해서, 사람을 낮춰보는 우(愚)를 범하기 쉽다. 다음은 ‘연합회의’에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화로 자신을 낮추어 남을 돕는 겸손하고 친절한 ‘조지 워싱턴’의 훌륭한 인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지 워싱턴'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있던 어느 여름날 홍수가 범람하자, 물 구경을 하러 나갔습니다. 물이 넘친 정도를 살펴보고 있는데, 육군중령의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초로(初老)의 ‘조지 워싱턴’에게 다가왔습니다.
   
 ― 노인,  미안합니다만, 제가 군화를 벗기가 어려워서 그런데요. 저를 업어
       이 냇물을 건네주실 수 있을까요?
    
― 뭐, 그렇게 하시구려!
       이리하여 중령은 ‘조지 워싱턴’의 등에 업혀 그 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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