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사 ,의병의 근거지 였다

1907년에는 전국의 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수복 전쟁을 펼쳤다.

이 무렵, 서울에서 동해안을 타고 포항으로 내려온 동엄 선생은 평시 항일전의 근거지가 된 포항시 기계면의 운주산 안국사(安國寺)에서 단오 대장을 비밀리에 만났다.

산남의진이 낙동정맥을 타고 북상하여 서울 수복 전쟁에 합류하는 작전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후 일어난 죽장면 입암리 전투에서 단오 대장과 이한구 중군장, 손영각 참모장을 비롯하여 본진의 많은 의병들이 산화하였다.

1907년 9월 1일에 일어난 한국독립운동사상 대혈전이었다.
백발노장 동엄 선생이 아들의 주검을 거두고는 2대 의병장이 되어 항쟁을 계속하다가 동대산에서 체포되어 영천 서세루 아래 남천 가에서 총살되고 말았다.

뒤를 이어 18세기 당대 최고의 저항 시인이었던 농수 최천익(崔天翼, 1712-1779)진사의 방손으로 을미의병을 지휘하기도 하였던 흥해의 선비 농고(農膏) 최세윤(崔世允, 1867-1916) 선생이 영천 거동사(巨洞寺)에서 3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어 형산강을 건널 때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나라가 망하자 11일 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일본군은 친일파를 앞세워 의병 항쟁을 돕고 그 근거지가 되는 전국의 사찰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각들은 불 지르고 석조물은 부수었다. 산남의진의 항일 전쟁 중에 보현산 비상사, 비학산 법광사, 운주산 안국사가 일본군의 표적이 되어 초토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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