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의 순국 100주년이 3월26일이다. 조선을 집어 삼키는데 결정적인 모사를 자행하고 본국 총리대신보다 조선총독을 택했던 이등박문은 지금도 일본의 화폐에 사진이 올라가 있을 정도로 가장 영향력 있는 죽은 사람 중의 하나다. 그가 조선총독의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하고 러시아 조계인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의사는 열차에서 내리는 이등박문을 육혈포로 쏴 죽인다.

그러나 최고위 VIP의 동선(動線)은 경호 때문에 여러 갈래로 분산되는 수가 많기 때문에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으로 오는 여러 역에 동지들을 배치하여 만일 이등박문이 미리 내리는 경우 저격을 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은 하얼빈을 택하여  역두에서 대기했다. 이등박문이 내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지체 없이 사살한다.

안중근이 재판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독립군 참모장의 자격으로 전쟁 중인 적군의 대장을 사살한 것은 정당한 행위였음을 역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자신을 국제법이 보장하고 있는 전쟁포로로 대우할 것과 일본법정이 아닌 국제법정에 세우라고 당당히 주장한 것은 장군다운 의연한 태도였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여론의 비등화를 걱정하고 일본 내에서 일고 있는 안중근의사에 대한 일종의 신격화에 놀라 속전속결의 재판을 진행한다.

안중근은 옥중에서도 쉬지 않고 자신의 자서전격인 ‘안응칠 역사’를 쓰고 이어서 동양평화론에 착수하지만 사형집행이 앞당겨지며 미완성으로 끝난다. 그는 그를 존경하는 일본의 옥리(獄吏)들이 부탁하는 붓글씨 써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데 그들은 자신의 집에 신주보다도 더 귀중한 수호신처럼 간직했다가 그 자손들이 안중근 기념관에 기증한 일도 있다. 그의 붓글씨는 지금도 많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데 주로 대한독립만세 등을 썼다.

그 외에도 평생의 경구가 될만한 말씀도 남겼는데 일일부독서(一日不讀書)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은 가장 많이 알려진 안의사의 경구다. 그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속에 가시가 돋을 것이라는 지극히 쉬운 얘기를 애써 순국 전에 우리 민족에게 남겼으니 배움에 대한 철저한 사상을 보여준다. 그가 쓰다가 중단한 동양평화론은 평생을 간직한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그는 1909년10월26일 거사 이후 1910년 2월7일 재판을 시작하자마자 7일 만에 사형이 선고되는 졸속재판의 희생자가 된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안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즉시 연락을 취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일 염려가 있으니 아예 항소를 포기하라”고 권유한다.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안중근같은 거인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든 어머니들이 이런 경우에 하루라도 더 살도록 자식의 항소를 권유했을 것이라는 통념을 단 한마디로 배제한 위대한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더구나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임을 갈파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그는 항소를 하지 않고 담담히 사형을 받아드린다. 현대의 형법은 사형이 선고되어 피고인이 항소를 포기하더라도 자동항소가 되도록 되어 있다. 생명이 걸린 문제를 1심에서 끝내는 것은 자칫 인권유린이 될 수 있다는 배려에서다.

그러나 일제는 40일 만에 전격적으로 처형한다. 안중근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을 만나 “내가 죽으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조국광복의 그날 고국으로 옮겨 묻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일제는 안의사의 시신을 유가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감춰버린다. 많은 이들이 사형이 집행된 여순감옥의 동남쪽 야산인 동산파(東山坡) 지역에 묻혔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양해를 얻어 남북공동유해조사단이 현장조사를 벌린바 있으나 유해는 찾지 못하고 매장지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보훈처장 김양은 이 문제에 대하여 색다른 견해를 밝혀 주목을 받는다. 그는 우선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한 해에 일본의 아키히토 왕이 방한할 가능성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친 후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일제당국이 비밀리에 일본으로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제2, 제3의 안중근이 유해 매장지를 찾아와 선서하는 등 성지화할 것을 우려했을 것이며 따라서 처음 묻었던 곳에서 이장했거나 일본으로 옮겼을 수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이기 때문에 어딘가 유해관련 기록을 보존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며 그 자료의 발굴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협조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일본은 안중근의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살피고 외교관례에 따라 과거사에 대한 사과의 뜻에서라도 안의사 유해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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