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익희(申翼熙, 1892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중국군인으로도 있었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고 1945년 귀국 후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2대,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초대학장을 지냈다. (字)는 여구(如耉), 는 해공(海公). 별칭으로는 중국에 체류 중 사용한 가명인 왕방평(王邦平)[2] 또는 왕해공(王海公)[3], 왕방우(王邦牛) 등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출신.  

임시정부 법무총장 등을 지내고 광복 후 국회의장으로서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해공 신익희(1892∼1956) 선생 54주기 추모식이 우무석 국가보훈처 차장과 이윤성 국회부의장, 김철수 국민대 부총장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동 묘소에서 거행된다.

선생은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을 겸했으며 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고 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56년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유세 중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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