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시위가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어 간다. 홍콩은 중국 광동성 남쪽 연안에 위치한 영국의 직할 식민지였으나 100년의 조차(租借)기간이 끝나며 중국에 반환되었다.

 

중국은 제2차 대전 종료와 함께 시작된 장개석과 모택동의 치열한 내전을 거쳐 공산통일을 이룩한 이후 홍콩의 위상을 두고 고뇌를 거듭했다.

 

민족의 자존심으로 영국을 쫓아내고 본토에 편입시키느냐, 아니면 세계적 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는 홍콩을 조차기간까지 기다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경제사정은 최악이었기에 홍콩이라는 경제거점을 버린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고 영국을 지원하는 미국 등의 강력한 배경도 고려하여 그대로 놔두기로 결정했다. 홍콩은 영국의 아편무역 근거지였으며 북경조약으로 구룡반도까지 내주는 등 야금야금 영국에 먹혀 들어갔으며 무관세주의로 큰 번영을 이뤘다. 종전 후에는 섬유를 비롯한 금속 식료품 전기기구 등 제조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쇼핑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조차기간이 만료되어 역사적인 ‘식민지 반환’을 받고도 향후 50년 동안 자치정부를 허용하는 파격적인 조치에 합의했다. 이른바 일국양제(一國兩制)다. 홍콩정부는 중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행정 입법 사법체제를 갖추고 자치경찰을 운영한다.

 

형식적이지만 선거를 통하여 뽑힌 행정장관이 수반 노릇을 하고 있는데 2017년에 실시될 예정인 행정장관 선거를 친중국계 아니면 입후보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간선제로 바꾸겠다는 결정을 중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했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1200명의 선거인단 추천을 받은 후보 두세 사람만을 행정장관 후보로 인정한다는 이 결정은 어떠한 저항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중국정부의 내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홍콩의 자치기간은 아직도 30년 넘게 남아있어 미리미리 손을 쓰겠다는 장구한 통치술이다. 우리나라는 유신시절 이미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경험했으며 이를 계승한 전두환정부가 노태우를 승계자로 앞세워 선거인단 선거를 강행하려고 획책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번졌고 6.29항복 선언으로 직선제를 쟁취한 일이 있다. 현재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 역시 ‘직선제 쟁취’에 그 목표가 있다.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은 뜻밖에도 나이 겨우 17세에 불과한 고교생 조슈아윙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세 때에도 홍콩행정부가 국민교육을 필수교재로 선정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는 12만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여 자진 철회시킨바 있다고 한다. 조슈아윙은 홍콩언론이 만들어낸 반중국 시위의 영웅으로 부각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시위대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거세어진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쏴대는 최루탄에 맞서 일제히 우산을 펴드는 통에 홍콩시가는 때 아닌 우산천지로 변했다. 이를 가리켜 세계 언론은 ‘우산혁명’이라는 새로운 조어를 창출해냈다.

 

리비아나 이집트에서 민중 시위대가 입은 셔츠의 색깔을 두고 오린지 혁명, 키위혁명 등 과일 이름이 등장하더니 홍콩에서는 우산을 펼쳐들어 고약한 최루탄 가루를 막아내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모두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한국에서는 6월항쟁 당시 도심에 집중된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젊은 새러리맨 시위대들이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이어서 넥타이부대로 불렸던 기억이 새롭다. 홍콩 시위대는 현 행정장관인 렁춘잉의 사퇴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만일 사퇴에 불응한다면 정부청사를 점거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에 대하여 홍콩경찰은 정부청사를 점거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겁박한다. 렁춘잉 행정장관 역시 사퇴를 거부하면서도 시위학생대표와 만나 사태수습을 논의할 수 있다고 제의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타협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중국정부는 시위불용(示威不容)의 입장이지만 강제해산과 같은 초강수는 머뭇거린다.

 

그들은 이미 1989년 5월 13일에 일어났던 끔찍한 천안문 사태를 잊지 않는다. 베이징대학과 베이징 사대생들의 단식 연좌농성은 닷새 만에 100만이 모여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민주화시위는 세계의 비난을 무릅쓰고 군대를 동원하여 유혈 진압했으나 2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후유증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 홍콩은 천안문과 닮은꼴이다.

 

24개 대학이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중·고생까지 확대되어 54년 전 한국에서 일어난 4.19혁명 양상과 한 치도 어김없이 닮아있다. 미국과 영국은 홍콩시위를 지지 격려한다. 미 국무성에서 만난 미 국무장관 케리와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서로 ‘인권탄압’ ‘내정간섭’으로 맞서고 있다.

 

이럴 때 가장 쓰기 좋은 중국식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진퇴양난(進退兩難)이요 호미난방(虎尾難放)이다. 중국통치 하에 있는 천안문과 달리 홍콩은 엄청나게 큰 부담이다. 세계의 눈이 무섭다. 그렇다고 홍콩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중국 내의 소수민족 자치정부인 티베트나 위그루 등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문제도 걱정이다. 그러나 홍콩의 민주화운동은 시대적 역사적 요구라는 사실을 중국 정부가 빨리 깨달아야 한다. 전 근대적인 강제진압은 G2로 성장한 중국의 위상에 치명타가 될 것이며 중국 번영의 근거지를 말살하는 자충수가 될 것임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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