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노무현의 자괴(自愧)

인간만 부끄러움을 느낀다. 또 부끄러움의 크기는 잘못이 아니라 양심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일찍이 맹자도 그걸 깨달아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들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을 군자의 두 번째 즐거움으로 꼽았었다. 마음 심(心)에 큰 가면을 쓴 사람을 그린 귀신 귀(鬼)가 붙은 괴(愧)는 뭔지 잘은 모르지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은 것, 마음 심(心)에 칼로 물건을 가른다는 의미의 일어날 작(乍)이 붙은 작(怍)은 자신의 속이 욕심과 양심으로 갈라진 게 드러났을 때의 부끄러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절대자나 윗사람을 대할 때 켕기는 게 없다는 말이고 사람들을 굽어보며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욕심 때문에 양심을 속인 적이 없다는 말로 새겨들으면 틀림이 없다.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했던 시인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읊었었다. 그의 ‘부끄러움’과 ‘괴로움’에 대해 하느님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의 자각”이라고 어렵게 해석하지만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나름대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괴롭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혹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은 없는지를 몰라 ‘잎새에 이는 사소한 바람’ 같은 순수에도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여신도들과 간통하고도 “회개하여 주님께 용서받았다”고 침 튀기며 딴 교회 차렸던 이영희 전 뉴욕장로교회 목사 같은 사람은 백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 못할 ‘부끄러움의 순수’라고 하겠다. 

앞으로는 ‘깨끗한 정치’를 외치면서 뒤로는 꼬질꼬질한 돈 받은 사실이 까발려져 시쳇말로 쪽이 다 팔려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람 사는 세상’에 올린 ‘홈페이지를 닫아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라는 글에서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다.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 버렸다. 나를 버려달라”고 자괴(自愧)했다. 형님, 아내, 친구 등이 모두 ‘부끄러운 일’에 휘말린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살 게 뻔한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는 것이다. 하긴 이미 인민재판 같은 수사과정에서 그의 인격은 짓밟힐 대로 짓밟혀 ‘스스로 부끄러워하다’라는 의미의 ‘자괴’가 ‘스스로 무너지다’라는 의미의 자괴(自壞)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표리부동하게 치사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양심까지 떨이 세일한 것 같지는 않아서 밉지는 않다. 어줍잖은 동정이 아니다. BBK 의혹은 물론 위장전입과 자녀 위장취업 및 탈세에 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사과 한 마디 안한 이명박 대통령, 수천억의 ‘검은 돈’을 착복하고도 28만원밖에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 전두환 전 대통령, 맡겨놓은 ‘검은 돈’을 동생이 꿀꺽하자 소송까지 벌인 노태우 전 대통령 등등에 비하면 군자 중의 군자라는 말이다. 

맹자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꼽으면서 “천하의 왕 노릇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而王天下 不與存焉)”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었다. 왜? 노 전 대통령처럼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있을 적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다가 가장 더러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 후에야 비로소 부끄러움이 뭔지를 깨닫게 된다는 경고(?)가 아닌가?
재임 중에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는 듯이 오기정치를 일삼다가 퇴임 후 몰매를 맞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초라한 알몸을 보여주고 있는 ‘바보 노무현’의 자괴가 안쓰럽기 짝이 없다.  <채수경 / 뉴욕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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