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의 장터기행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예부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상업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오고 가는 소통의 장소로 문화창달의 랜드마크였다. 여기에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의 중간자 역할을 해왔던 보부상 역시 한국 유통업의 시작을 알린 주역으로, 오늘의 상업문화 성장에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장의 급성장으로 이 같은 전통시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에 본지는 우리의 전통시장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미래세대의 문화 전달을 위해 베스트셀러 '악어새'의 저자 이재인 소설가의 ‘왁자지껄 장터별곡’을 기획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죽물시장의 모습 (사진=이재인 소설가)
죽물시장의 모습 (사진=이재인 소설가)

지금의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장날을 기다리면서 살았다. 시오리 혹은 십리밖에 학교에 갔다가 닷새 만에 한번 서는 장날은 북적이는 장판에서 어머니도 만났다. 덕분에 배고픔에 떡을 사먹고 시장기를 달랜다. 유량극단에서 벌이는 연극구경도 한다. 그 감동은 심금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수일과 심순애가 벌이는 사랑과 이별의 대화……. 떡 전 앞에 서성이다가 우연히 만난 어머니와 함께 인절미로 배를 채우던 추억. 월사금이나 기성회비를 내고 거스름돈으로 엿치기하여 돈을 잃은 무모한 행동, 그뿐이 아니다.

장날을 택하여 선거운동을 나선 국회의원 입·후보자의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웅변 섞인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장차 한번 후보자로 나설까? 싸전에서 미곡을 팔고 사는 사람들의 배춧잎처럼 퍼런 지폐도 눈으로나마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장날이었다.

장터 대장간의 풀무 간에서 석탄불에 벌겋게 익은 쇠를 두들겨 만드는 장인의 갖가지 농구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우시장에 내려서면 갖가지 가축들이 어미를 찾는 애절한 소리로 여기저기에서 엄마 찾는 비명들이 진동했다. 음매애 음매애, 어미 찾는 새끼 염소의 애절한 부르짖음에서 모정의 그 소중함. 눈깔 속에 두려움과 독기를 품은 세파트 개들의 노려보는 눈동자, 움메에 움메에, 어미 찾는 송아지 애타는 소리가 소년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소년을 어저께 저녁에 어머니가 잡곡 서너 말 머리에 이고 장에 간다는 말을 밥상머리에서 들었다. 아차, 학교가 파하면 엄마 찾아 장 구경을 하려는 생각으로 장마당으로 달려왔다. 엿, 떡, 장날의 난전마다 낡은 차일이 여기저기에 펼쳐지고 그 안에는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신발장사, 떡장사, 만물장사, 국밥장사, 잡곡장사, 싸전 대장간, 가축 장터 등 없는 것이 없을게 장마당은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복조리사시오. 복조리유우~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죽물시장이다. 소년은 낼 모레가 섣달그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믐께 장날은 어머니가 반드시 장에 출입했다. 어머니는 손수 복조리를 사야만 했다. 설이 시작되기 전에 복조리 장만은 농촌에서 반드시 지켜지는 절기 중에 절기이다.

복조리는 설날 아침 혹은 섣달 그믐밤 자정이 넘어서 출입문에 걸어둔다. 조리는 밥 짖는데 쌀을 일거나 보리를 이는데 사용되는 기구이다. 그러니까 내년에도 조리에 담긴 쌀알 같이 수많은 복이 들어온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풍속이었다. 그래서 한 가정에서 여러 개의 복조리를 사다가 출입문에 걸어 두었다. 걸어둔 복조리만큼 복이 들어온다고 믿는 민간신앙에 장날의 죽물 마당은 만원을 이루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죽물시작에는 콸키도 불티나게 팔린다. 콸키는 긁어 들이는 농기구이다. 그래서 농민들이 몇 개씩 사서 소중히 대문 안에 걸어둔다. 죽물시장, 지금은 완전 서양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추억의 실타래 속에서 남아있으므로 전통의 씨가 마르지 않는다. 다행이다.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이는 산물인지도 모른다. 복조리는 어머니가 주로 사왔다 부엌에서 사용되는 여성용이었다. 

밀려나가는 게 어디 죽물만일까?

죽물시장도 양철에 밀렸다. 그리고 양은에 밀리고 또, 플라스틱에 밀렸다. 이윽고 스테인리스에도 밀렸다. 가내 수공업으로 국내 유일했던 담양 산물의 생산품은 풍전 등화의 수준을 넘었다고 할까? 죽물에 이제는 홍콩산, 대만산, 중국산이 떼로 밀려들었다. 그들의 현란한 갖가지 채색의 염색, 죽물은 담양죽물을 양적으로, 그리고 가격경쟁으로 파도처럼 밀려와 마침내 장터까지 중국산으로 둔갑했다.

우리의 대나무 장인의 세공 솜씨는 문자 그대로 예술품의 경지에 이르렀다. 광주리, 키, 반합, 바구니 콸키, 복조리 삼태기 등 우리의 죽물들은 생활의 반려였고 늘 우리의 손길이 닿는 정든 애물이었다.

대나무 소쿠리에 담긴 보리밥, 찰밥, 무밥, 팥밥, 콩밥을 담은 죽물은 이제 저속한 천덕스런 화장으로 우리 국산을 모조리 밀어 냈다. 우리의 것은 처량한 신세이다. 이제 담양 죽세공품은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죽물시장도 아침 개장(開場). 점심 무렵에 파장이다. 죽물은 다 팔은 상인은 신명나게 소리를 내면서 난전을 정리했다. 

간다간다 나는간다 / 내려가면 원제오나 
장판인생 넉넉하다 / 너도사고 나도사면 
죽물시장 돈이쌓여 / 어디다가 쓰느냐고  
독립자금 내고나면 / 대한독립 금수강산  
간다간다 나는간다 / 어디가냐 산너머에 
강을건너 산을넘어 / 간다간다 집에간다

이와 같이 죽물장수의 18번곡이다. 죽물장사 자신은 전 세계적으로 대나무가 500여 종이나 되고 이 대나무는 외떡 식물로 나이테가 없는 나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솜대 왕대, 해장국, 이대, 조릿대, 맹종죽이 있다고 소리쳐도 일반 장꾼들은 이에 무관심하다. 얼른 설명 그만두고 값이나 깎으라고 재촉한다.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은 활, 화살 창, 식기를 비롯해 악기로 피리, 퉁소, 대금, 부채, 건축재 울타리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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