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 신현지 기자]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너무 쉽게 잊는다. 그래서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거나 이로 인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니 역사만큼은 결코 인간이 잊힐 권리라는 망각의 범주 안에 해당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올해로 103주년이 된다.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국권 상실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국가의 주권 회복을 위해 계급·계층·종교·지역·성별을 넘어 분연히 일어선 역사적 대규모의 민족운동이다. 세계를 향해 자주독립을 외치던 민족운동은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려놓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강력한 토대가 됐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이 있기까지 을미의병운동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치열하게 항쟁해온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 역시도 애국지사의 후손에 대한 예우는 물론 일제 잔재 청산에 얼마만큼의 속도를 내는 것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본지는 신년호 기획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땅에 몸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또 그 정신을 되새기고자 ‘기억합니다’라를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최용덕 공군 중장(왼편)과 김용하 육군 소령,(오른편) 송태호 하사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사진=국가보훈처) 
최용덕 공군 중장(왼편)과 김용하 육군 소령,(오른편) 송태호 하사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사진=국가보훈처) 

올해로 6.25전쟁 72주년을 맞는다. 6·25전쟁 발발에 수많은 참전 영웅들이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포화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또 수많은 호국영웅이 이름 모를 산야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아 이들 참전 영웅들을 기억하기로 한다.

먼저, 국가보훈처가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한 최용덕 대한민국 공군 중장과 김용하 육군 소령, 송태호 육군 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로 한다.

최용덕 공군 중장은 6·25전쟁 당시 공군사관학교장으로 재직하며 김포기지 방어를 위해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적군과 대치하였으며, 이 외에도 항공기지 사령관과 작전참모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제2대 공군 참모 총장에 취임해 휴전될 때까지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공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같은 공적을 남긴 최 중장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나 봉명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경술국치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중국어와 새로운 사상을 익히고 접했다.

191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중국군 초급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한 최 중장은 3·1운동 직후 중국군에서 나와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후1920년엔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해 전투기 조종사로 독립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광복군에서는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귀국해 공군 창설에 헌신했다. 1948년 창설된 육상경비대 항공사령관에 임명되어 항공 분야의 발전과 요원 양성에 이바지한데 이어, 국방차관으로 국군조직법을 초안해 공군 독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 6·25전쟁 직전 공군사관학교장에 보임된 그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 경비와 북한군의 김포반도 상륙 저지에 나섰다. 1952년 12월,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서 동해안의 전략요충지인 351고지의 근접항공지원작전을 주도해 적의 위협을 제거하는 등 대한민국 공군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친 여러 작전을 이끌었고, 1953년 3월 13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체신부 장관과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1969년 8월 15일 광복절 자택에서 영면했다.

6‧25전쟁영웅 김용하 소령은 1950년 7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적 제2군단 예하 제1사단의 남진을 저지시킨 ‘이화령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중대장으로 주력의 철수를 끝까지 엄호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전쟁영웅이다.

김 소령은 1926년 11월 29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출생했고, 육군 사관학교 제6기로 입교하여 1948년 7월 28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 초기에 제6사단 2연대에 배속된 그는 홍천지구 전투에 이어 충주지구 전투 중 달천강 도하작전에서 효과적인 근접 지원사격으로 큰 전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사단의 소백산맥 방어작전에 따라 제2연대 1대대 중화기중대장으로 문경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로 ‘이화령 전투’에 참전했으며, 전략적 요충지인 이 지역을 빼앗기게 되면 방어선을 낙동강까지 물려야 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화령 방어를 담당했던 제2연대는 북한군의 공격에 진지를 빼앗긴 후 역습으로 진지를 탈환했으나, 또다시 적의 공격으로 철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제1대대장 박노규 중령은 중화기중대장인 김용하 대위(당시 계급)에게 화력으로 아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할 것을 명령했다.

적의 포격이 급증하는 가운데 김용하 대위는 총알이 빗발치는 능선에서 대원들을 독려했고 중대가 철수하기 전에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해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던 김용하 대위는 쏟아지는 적 포탄의 파편을 맞고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사진=국가보훈처)

정부에서는 김용하 대위의 헌신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송태호 육군 하사는, 1951년 6월 1일 육군에 입대했으며  6·25전쟁 당시 제1사단 제15연대 수색중대 제1소대에서 소총수로 복무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이 연천 북쪽 임진강 북안의 고양대 부근 니키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인해전술로 공격을 감행하자 결사대를 이끌면서 진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니키고지 전투 과정을 보면, 송태호 하사는 1952년 10월 1일 고양대 일대에 투입했으며,  6일 후  중공군 추계공세의 개시로 제15연대 방어선이 공격되자  송태호 하사를 비롯한 소대원들은 동굴호에 집결했다. 그리고  중공군을 진지로 끌어들여 진내사격으로 섬멸하고자했다.

그러나 소대가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무선 실패로 부득이 결사대를 편성, 송태호 하사 등 4명의 결사대가 수류탄을 던지며 동굴 입구로 돌진했다. 이때  중공군이 설치한 TNT가 폭발하면서 송태호 하사는 흙더미에 파묻혀 의식을 잃었다.

이후 의식을 차린 송태호 하사 등은 대검으로 흙더미를 파헤치고 빠져나와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곧이어 아군 중대가 역습을 가해 적을 격퇴함으로써 진지를 사수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송태호 하사는 1952년 11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송태호 하사는  정전협정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53년 6월 12일 서부전선의 무명고지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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