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수의 이야기

대한민국 마도로스 1세대인 신영수의 ‘마도로스의 삶과 人生’을 통해 바다를 유영하는 마도로스의 세상을 품은 진실한 삶과 인생을 엿본다. 신영수는 부산 출생으로 5대양을 다니며 세월이란 그것을 보내는 장소에 따라 전혀 그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괴로움과 슬픔도, 그리움과 미움도, 노도가 포효하는 바다도, 시간이 흘러가면 거울 같은 해변으로 변하는 것 같이, 시간이란 명약으로 치유시키는 사나이들, 그 이름 마도로스! 작가 신영수의 지나온 삶을 통해 대한민국 마도로스 1세대의 바다에서의 역동적인 모습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FIJI에서의 가난한 도둑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적도 근해의 항해는 신부의 거동만큼이나 조심스럽다
유리알 같이 맑고 조용한 바다 위에 여기저기 숨을 죽이고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의 정경이 평화롭다
푸르디푸른 하늘의 흰 뭉게구름을 이고
바다가 하늘인지 하늘이 바다인지 가르기 어려운 그림 같은 무풍지대
이렇게 아름다운 대자연의 조화를 행여나 깨트릴까 뱃길을 줄이게 한다.
이번 항해는 남태평양의 섬나라 FIJI 에서 원당을 선적하여
영국의 런던으로 운송하게 되었다.

피지는 뉴질랜드 북쪽에 위치한 300여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호주, 뉴질랜드. 동남아시아, 미국 사이에 위치해 있어
항해와 항공 네트워크의 중심축을 이루는
전략적 상업적 요충지이다.

지상낙원이라 일컫는 피지섬들은 두개의 큰 섬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산재해 있는 작은 섬들이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배가 수도가 위치한 라후토키항 연안에 이르니
푸르게 뒤덮인 열대림을 비집고 도란도란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항구가
멀리서 우리를 반긴다.

외항까지 마중나온 도선사가 안내하는 항로를 따라가다 보니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 밑에
흡사 돌담처럼 산호초들이 섬 주위를 둘러싸고 생성되어
자연적인 방패환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하역부두라야 겨우 2만 톤급 우리 배 한 척이 접안할 수 있는 규모다
그곳의 하역 인부들은 몸집이 크고 건장한 원주민들로 상머슴처럼 강단하고 성근했다.

누런 원당을 모래라도 다루듯 무더기로 선창에 퍼붓는 작업을 보면서
옛날 어린 시절 금싸라기처럼 귀히 여기던 설탕을 떠올리며
너무 함부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피지는 1874년부터 1세기 동안 영국령이 되면서부터
인도에서 수많은 계약노동자들을 끌어 와서 코프라와 사탕수수를 재배케 했고
오늘날의 사탕수수 생산국을 이루었다고 한다.

시내에 들어가 보면 여느 나라처럼 인도인과 중국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듯 했고 영국 식민지 지배 때 유입된 인도인 후손들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골의 넓은 들판은 거의가 사탕수수밭이었고
원주민들의 민가에 들어가 보면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의 농촌과 다름이 없었으나
가난해도 소박하고 착한 인정이 우리나라 시골처럼 포근했다.

우리 배는 정박 중 하역 인부들이 주야로 교대 근무로 원당선적을 계속 했는데
하여 이틀째의 새벽 4시경 이었다.
선장인 내 침실과 문 하나 사이인 사무실에서 책상 서랍을 급하게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놀라서 내복바람으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보니
책상 앞에 팔만대장성 같은 현지 원주민 한 사람이
무우를 캐먹다가 들킨 놈처럼 우뚝 서 있지 않은가
문밖에는 누군가 또 한 사람이 있는지 인기척이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다가가서 그 도둑놈의 손목을 덥석 잡자
그는 잽싸게 손을 뿌리침과 동시에
무서운 주먹을 날렸다.
눈에는 별빛이 쏟아지고 피하거나 때리거나 난투극이 벌어졌다
한동안 사생결단의 긴박한 장면이 연출되는 우당탕 거리는 소리를
아래층에 있던 1등 항해사가 뛰어 올라왔을 때
나는 거의 실신 상태가 되어 있었다.

잠자던 선원들이 깨어나 한편에서는 튀는 도둑을 쫓고
나는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몸통해진 정신 속에 이렇게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의식이 가물가물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듯 했다.
내가 겁도 없이 도둑의 손을 잡은 것도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 도둑님도 골리앗 같은 거구의 큰 주먹으로
몇 대 때리고 도망가 버릴 일이지
어쩌자고 무주먹이며 키도 작은 나를 저승 문 앞 일보직전까지 가도록
파김치를 만들어 놓았는지 야속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둑들은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넘기고 겨우 정신이 들어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대했을 때
일그러지고 멍든 모습은

스스로도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정도로 참담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감사했다.

이역만리 남양군도에서 소문낼만한 일도 아닌 일로
억울하게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불효스러운 일인가
입원 중 조사차 들른 현지 경찰관들에게 붙잡혔다는 도둑을 선처해 주라고 했다
내 뜻은 결코 위선이 아니었다.
강도에 대한 증오심이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가난한 도둑이었을 것이라는 연민의 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어오른 입을 빌릴 수 없어서
종이에 글로 써 일러준 내 뜻을 경찰관들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마워하는 기색이었다.

가난은 분명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을 핑계로 죄를 유발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절도나 강도는 어떤 이유에서건 정당화 될 수 없고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좀도둑은 동정의 여지라도 있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그보다 요즘 슈퍼 급 도둑은 훔치는 규모도 억 단위로 늘어
과감 무쌍하게도
개인, 회사, 단체, 국가의 재물을 가리지 않고
가차 없이 들어먹는 재주가 유행된 판국이다
그 양상이 공․사직의 하위직에서부터
위로는 왕위에 계셨던 분들까지 망라해 들어먹는 나라는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좀도둑은 잡히기만 하면 준법정신에 따른 무서운 법 적용으로 처벌 하는데
큰 도둑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도급의 비례에 따라
경감면되어 입가시고 거드름을 피우며
태평성세를 누리고 계시니 빈도유죄, 부도무죄의 어이없는 세상이다.
프랑스 위고는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을 19년 동안이나 감옥에 살게 했는데
코리아의 거도들은 열 평생을 먹고도 남을 빵 값 보다 많은 거액을 훔쳐도
호화주택에서 호의호식하며 호강스럽게 산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 병원 근동의 환자들과 문병인들까지
도선생에게 망가졌다는 나를 보려고 병상이 북적거렸다.
며칠 후 현지 방송과 신문에 강도 2명 중 나를 욕보인 도둑은 붙잡혀
자작나무 몽둥이로 12대를 맞고
4년의 징역에 처했다는 것이다.
계속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시퍼렇게 멍든 얼굴은 더 부어올라 보기엔 산송장 같았다.

그러나 그 사이 원당선적은 완료되어 출항을 서둘러야했다.
선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치료도 중지하고 험상궂은 모습 그대로 병원 문을 나섰고
마지막인 아름다운 섬나라 피지의 기항에
하필이면 아쉽게도 평생 잊지 못할 궂은 추억을 남기고
런던을 향해 닻을 올려야 했다.
이제는 가난한 도둑도 없는 지상 낙원이 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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