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규, 독립장 (1995)
정원명, 애국장 (2014)

[중앙뉴스= 신현지 기자]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너무 쉽게 잊는다. 그래서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거나 이로 인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니 역사만큼은 결코 인간이 잊힐 권리라는 망각의 범주 안에 해당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올해로 103주년이 된다.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국권 상실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국가의 주권 회복을 위해 계급·계층·종교·지역·성별을 넘어 분연히 일어선 역사적 대규모의 민족운동이다. 세계를 향해 자주독립을 외치던 민족운동은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려놓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강력한 토대가 됐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이 있기까지 을미의병운동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치열하게 항쟁해온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 역시도 애국지사의 후손에 대한 예우는 물론 일제 잔재 청산에 얼마만큼의 속도를 내는 것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본지는 신년호 기획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땅에 몸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또 그 정신을 되새기고자 ‘기억합니다’라를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왼쪽)안원규 선생과 정원명 선생  (사진=광복회)
(왼쪽)안원규 선생과 정원명 선생  (사진=광복회)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 창립에 기여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안원규 선생과 정원명 선생을 기억하기로 한다.

안원규 선생은 1877년 8월 30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하와이 이민 광고를 보고 1903년 3월 3일 두 번째 이민을 온 후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했고, 잡화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7년부터는 양복점을 경영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노골적으로 국권을 빼앗기 시작했는데 이에 국권 회복을 위해 하와이 각 지방에 조직되어 있었던 단체 대표자들이 1907년 9월 호놀룰루에서 각 단체 주무원들과 정원명 등이 회합을 가진 뒤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안 선생은 한인합성협회 부회장에 선임됐다.

한인합성협회는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동포들 간의 어려움을 먼저 구제하고,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안 선생의 주도로 협회는 공진회·자강회·의성회·국민동맹회의 4개의 단체가 연합했다. 또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미 본토의 공립협회가 하나로 합하여 1909년 2월 1일‘국민회’가 출범했다.

북미의 대동보국회도 통합에 참여하여 1910년 2월 10일부터‘대한인국민회’로 미주 한인단체가 모두 통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선생은 주도적인 활동에 나섰다. 또 1935년 1월 하와이 국민회에서는 독단적 운영을 막기 위해 입법기관인 참의부를 설치되었을 때 선생은 참의원으로 활동했다.

미주지역 최고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지역적 차이로 미본토에 집행부를 두고, 하와이에 의사부를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선생은 부원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와 미국정부의 가교를 놓는 역할은 물론이고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병을 얻어 1947년 5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 퀸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다가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선생의 유해는 다이야몬드헤드 기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와이 한인 지도자 정원명 선생은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과 독립자금을 후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열정을 다했다. 1881년 11월 20일 평양에서 태어난 정원명 선생은 기독교학교에서 공부하고 미국인 선교사의 요리사로 일하며 영어를 익혔다.

영어에 능통해 하와이에서는 에와(Ewa)농장에서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인들을 위해 통역 역할을 했다. 특히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통역을 맡아 한인동포들의 여러가비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등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 한인조직으로는 친목회가 있는데,‘친목회’는 1906년까지 하와이 각처에서 친목을 표방하는 단체나 조직이 여러 곳에서 결성되었다. 에와친목회는 1905년 선생과 병구 등 통역과 같이 지식층이 주도가 된 단체였다. 친목회는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동참하면서 국권회복운동 단체로서의 활동했다.

국내에서 정미조약 이후 국권회복 운동이 벌어지자 하와이 한인단체들도 통합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로 1907년 9월 선생은 지역 한인단체 대표들과 뜻을 모아 한인합성협회를 이끌었다.

한인합성협회 이후 통합적인 움직임을 가진 한인단체들은 자주 변모했지만 선생은 계속해서 단체의 중요한 자리를 맡았고, 미주지역 거대통합 조직인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될 때도 주요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대표원 등을 지내면서 하와이 한인단체의 주요 자리를 맡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1년 5월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한인 실업가들인 선생과 안원규 선생 등 20여 명이 모여 호놀룰루한인상업회를 조직되었는데, 회장에 안원규 선생, 재무에 정원명 선생이 선출되었다. 이어 1922년에는 호놀룰루한인상업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에는 한인기독교청년회의 회장을 맡았다. 또 1923년 한인감리교회 학생 기숙소가 설립되었을 당시 안원규 선생과 함께 이사부원으로 임명됐다.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한인협회’를 조직했는데 선생은 한인협회의 임시위원으로 선출됐다. 그 후 선생은 1936년 1월 하와이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참의원과 역사편찬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임시정부의 군사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찬무회를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찬무회의 회원과 하와이 한인교회연합회의 정식 이사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교회를 핍박하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1942년 6월 23일 갑자기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오아후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안원규 선생에게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정원명 선생에게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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