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해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었다.

조정현 컬럼니스트
조정현 컬럼니스트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미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위의 기독교 신약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진부할 정도로 유명하다.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동네 이장 선거까지 모든 정치적인 사람들에게는 특히 읽게 하고픈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본격적으로 총선이 다가오는 듯하다.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문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문맥을 빠뜨리고 나면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곤경에 빠진 한 인간을 도와준 어떤 착한 이웃의 선행담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된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한 선행담이 아니다.

나사렛 예수가 활동했던 시대의 유대인 사회에서 ‘이웃’이라는 말이 의미한 것은 혈연 동질성을 가진 동족집단의 사람들과 그 동족 내부의 가까운 친구들이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만이 이웃이다.

그들만이 한 식탁에 앉을 수 있고 서로 초대하고 초대받고 그 초대된 식탁에서 환대받는다. 종족이 다르면 이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른 종족의 사람과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금기’이다. 이것이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핵심적인 당대적 문화 정보다. 지금 지구 저 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저렇게까지 서로 증오하는가에 대해서 역사적인 맥락 외에 이러한 문화적 맥락 또한 참고할 만하다.

여하튼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을 구출한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사마리아인이지 유대인이 아니다. 더 중요하게도, 유대인과 사마리안인은 서로 우호적 관계에 이었던 종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안인은 친구도 이웃도 아닌 서로 자주 적대관계에 놓이곤 하던 이종족이다.

그러니까 루가의 복음서의 사마리안인 이야기는 유대인의 이웃이 아닌 자가 구출한 이야기다. 더구나 곤경에 빠진 유대인을 피해서 지나가버린 사제나 레위인은 모두 같은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모른 체하고 지나가버린 유대인 봉변자를 유대인 아닌 사마리아인이 구해준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율법교사(그는 당연히 유대인이다)가 나사렛 예수에게 던지는 질문(“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은 일종의 도전이다. 도발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텍스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율법교사는 예수가 유대사회의 행동기준을 어기고 이방민족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하면 심지어 창녀, 거지, 생선장수처럼 지체와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도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예수에게 그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당신에게는 누가 이웃인가? 유대인 아닌 자가 당신의 이웃인가?”라며 도전적으로 묻고 있는 셈이다. 또 그 율법교사에게 예수가 들려준 사마리안인 이야기는 텍스트 배후에 이런 반격을 담고 있다. “유대인은 유대인을 돕지 않았다. 그를 도운 것은 사마리안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유대인의 이웃인가?”

종족, 지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초대해서 한자리에 앉고자 했던 것이 나사렛 예수가 차려 보인 ‘환대의 식탁’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그러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자기가 그러하다고 거짓으로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은 혹시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변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저 ‘환대의 식탁’을 기필코 강요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것의 대의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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