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 조정현 컬럼니스트]  “네 살 때 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인생이 너무 따분하고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 따분한 인생을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자서전’(1967~1969)에 써넣은 한 대목이다.

자살을 생각했던 아이는 자라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옥스퍼드대학 교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을 이끈 인권운동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고 98세까지 살았다. 그가 말년에 돌아본 그의 일생은 네 살 때 그를 따분하게 했던 그런 인생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이끈 뜨거운 열정과 그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가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글은 그가 자서전에 쓴 프롤로그다.

조정현 컬럼니스트
조정현 컬럼니스트

“단순하지만 매우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결딜 수 없는 연민이 그것이다. 이 열정들은 마치 거센 바람처럼 나를 이리저리로, 고뇌의 깊은 바다로, 절망의 벼랑으로 휘몰았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이 주는 황홀함 때문이다. 그 황홀함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그 환희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나머지 인생을 모두 바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그다음 이유는 사랑이 외로움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몸서리치며 세상의 가장자리 너머 차갑고 측량할 수 없는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마지막 이유는 사랑의 합일 속에서 성자들과 시인들이 상상했던 천국의 신비스러운 축소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추구했고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기엔 너무 좋은 것일지도 모를 그 사랑을 나는 찾아내었다. 똑같은 열정으로 나는 지식을 추구했다. 나는 인간의 가슴을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별들이 빛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수(數)가 혼돈을 다스리는 저 피타고라스적 힘을 이해하고 싶었다. 많지는 않지만 약간의 지식을 나는 성취했다. 사랑과 지식은 가능한 한 높이높이 나를 천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나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고통의 절규가 메아리치며 내 가슴속에서 울려 퍼진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에게 고문당하는 사람들, 아들들에게 미운 짐이 돼버린 무력한 노인들, 그리고 외로움과 가난과 고통에 찬 세계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조롱한다. 나는 세상의 악을 줄여보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그래서 나 또한 고통 받고 있다. 이것이 내 삶이었다. 나는 그것이 살아볼 만한 삶이었다고 생각하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그 삶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버트런드 리셀 자서전 서문(우달임 옮김, 2011))

러셀이 자서전 프롤로그로 쓴 이 글은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단 다섯 개의 단락 안에 자신의 삶 전체를 요약한 명문이다. 글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은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좋은 글이 드문 시대라는 것은 위선과 왜곡의 ‘가치’를 합리라고 내세우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글에는 반드시 사실적 과거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성찰을 바탕으로 한 현재에 대한 미래를 투영한다.

누구인들 ‘내 인생을 이끈 열정’을 말할 수 있을까. 열정이나 꿈이라는 것은 그만한 ‘가치’에 관계된 인생을 말하는 것일 터인데 게다가 그것이 남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열정과 꿈이었다면 글의 맥은 더 깊어진다. 결국 세 번째 열정 즉, ‘연민’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누구인들 더 ‘높이높이’ 올라가고 싶지 않을까마는 러셀은 그 ‘연민’이라는 열정으로 좀 더 큰 꿈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연민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난과 고통과 외로움으로 시달리는 아이와 어른 노인들을 위한 삶을 함께 하기 위해 그 또한 고통을 기꺼이 감내했다. 국민을 ‘어엿비’ 여기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진정한 정치인 것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하는 한 개인의 성공한 자보다는 그 ‘연민’으로 낮은 곳에서 사람을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벌거벗은 자가 더 큰 가치를 꿈꾸는 자를 우리는 항상 말한다. 우리의 가난과 고통과 외로움을 함께 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향해 바짝 엎드려 밭을 먼저 일구는 사람. 우리는 그러한 더 큰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을 마땅히 원했다고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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