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을 누가 건져냈을까
김주열을 누가 건져냈을까
  • 전대열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17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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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자료사진)
전 대 열 전북대 초빙교수

[중앙뉴스=전대열] 해마다 3월15일이면 어김없이 마산을 찾는다. 이제는 지역 간 통합으로 마산 창원 진해가 하나가 되어 창원으로 바꼈지만 지금도 가장 낯익은 이름은 마산이다.

젊어서 마산을 처음 찾았을 때 아침 해장으로 아구탕을 먹었던 기억은 이름도 이상했지만 그 맛이 그만이어서 50년이 넘은 자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서 좌판을 벌리고 앉았던 인심 좋은 그 곳이 1960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권좌에서 쫓아내는 첨병 구실을 했다는 것이 못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4.19혁명의 발원이었던 3.15의거와 10.26유신종말을 빚어낸 부마항쟁의 큰 역할을 항구도시 마산이 해냈던 것이다.

올해도 4.19혁명공로자회(회장 유인학)에서는 33명의 동지들이 하루 전날 출발하여 고령 대가야박물관을 관람하고 김해 김수로왕 능을 참배한 후 아침 일찍 창원 3・15아트센터 대극장 기념식장에 도착했다. 이낙연 국무총리, 이주영 국회부의장 등과 보훈단체장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참석하여 분위기를 달궜다. 우리 일행은 식이 끝난 후 곧바로 국립3.15민주묘지를 찾아 민주주의를 되찾겠다고 외치다가 숨진 영령들께 향을 사르며 명복을 빌었다.

묘역 내에 있는 3・15의거전시관은 서울보다 훨씬 크고 정돈된 전시물을 진열하고 영상자료까지 준비하여 수도와 지방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역대 정권에서 모두 4.19혁명을 떠받들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은 하면서도 혁명을 총 정리한 수도 서울의 4.19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길이 없다. 너무나 초라하다.

그나마 4.19혁명공로자회에서 작년부터 시작한 4.19혁명 세계4대혁명화운동은 금년에는 그 규모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도 직접 참여하고 TV로도 생중계할 계획이어서 뭔가 국민들을 향하여 빚을 더는 느낌이 있긴 하다. 내년에는 혁명 60주년이 되기 때문에 광화문 광장에 41.9m에 달하는 기념탑을 세우고 번듯한 민주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정부당국이 확실한 답을 내놔야 할 것이다.

이런 희망 속에서 우리는 마산 전시관을 둘러보며 마산상고에 합격한 김주열이 3・15시위 도중 행방불명되었다가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는 극적인 사건의 전말을 생생한 육성증언으로 들을 수 있었다. 감광풍회원은 나중에 조선대를 졸업했지만 원래 마산 사람이다.

행방이 묘연한 김주열의 모친이 “내 아들을 찾아내라”고 하얀 상복을 입고 마산거리를 누비고 다닐 때 시민들은 모두 함께 울었으며 동아일보를 비롯한 모든 매스컴은 김주열을 집중 조명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는데 이 날 최루탄이 눈에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른 것이다. 경찰이 돌에 매달아 바다에 던졌으나 26일 만에 돌이 빠져나가면서 떠올랐다.

감광풍은 2인용인 보트로는 시신을 건질 수 없어 전마선을 빌리려고 했으나 경찰이 무서워 선뜻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안심시킨 후 두 사람이 배를 저어 시신 곁으로 갔다. 죽은 지 오래되어 자칫 훼손될 염려가 있어 갈쿠리로 밀착시킨 다음 조심스럽게 부두로 끌어왔다.

엎드린 자세를 바로 뉘이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그 참혹함은 59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다. 김주열의 시신을 찾았다는 소문은 번개처럼 시내로 퍼져나갔으며 시민들이 에워싸고 울분에 찬 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경찰은 감히 접근도 못하고 계엄군 네 사람이 스리쿼터를 타고 나타나서 시신인계를 요구했다.

시민들이 이를 거절하자 “지금 계엄 하에 있으니까 시민들이 협조해야만 한다. 위반하면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시신은 군인들이 도립병원으로 이송했다. 시민들이 병원을 에워싸고 감시했으나 비밀리에 빼돌려 김주열의 고향인 남원으로 옮겨 가족들을 협박하여 몰래 장례를 치른 사실은 4.19혁명 후 모두 밝혀진 일이다.

마산의거로 3.15와 4.11 2차의거 당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12명이다. 전국적으로 186명의 희생자를 낸 4.19혁명의 진원지 마산에서는 200여명의 부상자까지 나왔다.

정부에서는 이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매년 정부주관으로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 때 김주열이 합격한 마산상고 출신으로 김종배 김정욱 배길수 한만석, 마산제일여고 학생회장으로 시위를 주도한 노원자 이정자, 마산고 박광규 박문달 진건정, 마산공고 박정석 안시준, 마산간호고 조성은 양말연, 마산성지여고 이영자 안명희, 일반인으로 이용환 천은순 등이 건국포장을 받고 공로자가 되었으며 3・15기념회장인 천봉화와 김주열의 시신을 건져낸 감광풍은 4.19혁명의 주역으로서 지금도 열렬하게 활동 중이다.

김주열의 시신은 마산에서 건져냈지만 현재 전북 남원시 금지면에 유택이 마련되어 있으며 마산3.15묘지와 서울 4.19묘지에는 가묘를 둬 참배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영령의 명복을 빈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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