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 신인문학상 당선작 ➇]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정태하
[중앙뉴스 신인문학상 당선작 ➇]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정태하
  • 신현지 기자
  • 승인 2018.07.20 1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
                                      

                                                  정태하
 
그해 가을 이었습니다.
“여보! 빨리 갑시다.” 아내는 술이 취해 방황하는 나를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두 손을 잡고 야간학교로 데리고 갔습니다.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라는 조그만 촌락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채 신문배달, 구두닦이 등을 하며 전전하다가 낯선 구미에 내려와 술집 종업원, 생선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힘든 삶을 고행해 오다가 스물 세 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동거하며 오로지 내일에 있을 희망의 그 날을 향해 힘차게 달렸습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어 춥고 배고픔과 배우지 못한 설움에 몸부림치는 나에게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라도 해서 뒷바라지 하겠노라며 ‛구미 향토학교’라는 야간 학교에 입학시켜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줬습니다.

나는 남들이 볼까 마치 죄인인 냥 숨죽여 가며 야간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구미 향토학교는 모 신문사 사무실의 한편에서 자원봉사교사인 금오공대생 5명과 어린학생 2명에 나까지 총 8명이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자원봉사 선생님들은 곱하기, 나누기도 잘못하는 나에게 부분 집합이나 원소 나열에 대해 열강을 했지만 30년 이상 녹슨 나의 머리는 좀처럼 수학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 두달 시간이 지나자 차츰 내머리에 불이 붙기 시작하며 공부 하는 게 신이 났습니다.

야간에만 공부하는 게 부족하여 낮에는 국, 영, 수를 과외로 공부하고 나머지 암기 과목은 야간학교에 나가서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선생님들 모두가 저에게 찾아와 “정 사장님, 끝까지 가르쳐 드리고 싶었는데 능력 부족이라 저희들이 교실을 구하지 못해 도저히 더 이상 가르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신문사의 사장님이 도저히 공간이 부족하여 안 되겠다며 장소를 비워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향토 학교는 문을 닫고는 말았습니다.

나는 배우는 학생 입장이라 운영은 누가 하며 어디에서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출강을 나오는지 알지 못 할뿐더러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내가 어떡해 해서 이곳까지 왔는데…그동안 춥고 배고픔과 배우지 못한 서러움에 남모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집에 돌아와 시름에 잠겨 있는데 사실을 알고 난 아내가 살며시 두 손을잡으며 “여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이러지 말고 어서용기를 내서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누구하나 저에게 선뜻 장소를 빌려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여보! 여보! 좋은 생각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옥상에다 조립식 가건물을 지어서 우리가 직접 야간학교를 운영하면 어때요? 그러면 당신이 공부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며칠을 고민한 끝에 옥상에다 조립식 가건물을 지어보자고 합의를 하고 건축사무실을 찾아가 문의를 했습니다. 불법 건축물이라 하여도 건물을 짓고 들어가 공부를 하면 괜찮다고 해 옥상에 조그만 사무실 3칸을 짓기로 1300만원에 계약을 했고, 일주일 후 새로운 야간학교가 우리집 옥상에 우뚝 솟았습니다.

나는 흩어진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다시 만난 우리들은 모두들 기뻐 어쩔 줄을 몰랐으며 모두들 새로운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마음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대형 칠판도 두 개사고 책상과 의자는 손수 앵글철판으로 맞추었으며 페인트도 우리 스스로 칠하며 모든 게 신이 났습니다. 공사가 모두 끝나고 분주하게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이게 또 웬날벼락입니까?

내용을 모르는 이웃 주민들이 무허가 건축물을 지었다고 관할동사무소에 신고하여 철거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고 온몸에 힘이 빠지며 이웃 주민들이 원망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안 돼. 내가 어떻게 지은 집인데.” 나는 도저히 그냥 물러 설 수가 없었습니다.동사무소 직원들이 찾아 올 때마다 온몸으로 저항을 해가며 가로막고 버티고 버텼습니다. 계속해서 실랑이를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구미시청 건축과에서 으름장을 놨습니다. 일주일 내로 자진철거 하지 않으면 강제철거 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인부를 동원하여 건물을 철거했고 아내와 학생들은 부둥켜안고 애써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결국 타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 더러운 놈들아, 너희들은 부모 잘 만난 탓에 그렇게 호의호식 했지. 너희들이 우리 같은 배우지 못한 자들의 설움을 알기는 하느냐.”그렇게 우리들의 피와 땀과 한이 서려있는 건물이 한순간에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못 배운 것도 서러운 데 이런 모욕적인 수난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길거리에서 포장마차 할 때에 동사무소 직원들이 날이 새면 찾아 와 포장마차를 강제철거 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알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이 봇물 마냥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이대로는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나와 아내는 동사무소와 구미시청을 찾아다니며 애원했습니다. “우리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야간학교를 세워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강제철거를 할 수 있습니까” 라며 악을 써보기도 하고, 큰소리도 쳐보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사연은 딱하고 이해는 되나 법을 어기는 것을 보고 그냥방치 할 수는 없습니다. 주위사람들 여론도 있고 해서. “라면서 “요즘은 민원신고가 제일 겁 나는 세상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날. 그 당시 새로 오신 원남동장님이 잠깐 들어와 조용히 이야기하자며 집무실로 저희를 데리고 갔습니다.

자초지총을 설명하자 동장님은 무허가건물을 짓는 대신 동사무소 2층 회의실을 빌려 줄 테니 야간에만 사용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뛸 듯이 기뻐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동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부끄럽지 않는 사회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며 인사했습니다. 난 다시 학생들과 만나 공부에 필요한 기자재며 살림들을 챙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제일 먼저 전화부터 한대 설치했습니다. 공부 준비에 많은 금액이 소요되었지만 아내는 전혀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저기 챙겨주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원남동사무소 2층에서 새롭게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몰래 숨어서 할 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학생과 교사를 모집하자 싶어 포스터 5천매를 손수 제작하고 몇 날 며칠을 풀통을 들고서 벽보를 붙이러 다녔습니다. 공개적인 홍보는 처음이었지만 일주일 만에 50명이 접수하여 1991년 6월 20일. 제4기 입학식을 원남동사무소 2층 회의실에서 조촐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학생은 52세의 김정연씨 외 59명, 교사는 김경식 선생님 외 20명이였습니다. 어느덧 검정고시 시험일이 되었습니다. 나와 학생 7명이 시험에 응시했고, 교사 3명이 저희를 응원하러 왔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어느덧 한 달이지나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 됐습니다.

나는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 합격발표장에 가지 못하고 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선생님과 아내를 대신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가보고 12시까지 합격하였으면 전화를 하고 연락 없으면 불합격 한줄 알고 있으라며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오전 10시가 지나고11시가 다가와도 연락이 없자 불안하고 초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정오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열두 번을 다 치도록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싶은 마음에 아내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합격을 위하여 뒷바라지해 왔던 아내 생각에 너무나 마음이 답답했고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곤 마구 중얼거렸습니다. “나란 놈은 안 돼. 어쩔 수 없어. 이제 더 이상 지긋지긋한 공부는 없다.” 라고 중얼거리며 대낮부터 마구 술을 퍼 마셨습니다.

오후 3시쯤 아내와 같이 갔던 선생님 셋이서 술집으로 저를 찾아온 것이아니겠습니까. “사장님! 집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까” 다짜고짜 선생님은 마구 나무라며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여러분 볼 면목이 없습니다.”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자 모두를 갑자기 “하하하” 웃기 시작했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웃는 얼굴로 짠! 하면서 합격증을 보여주며 “사장님 합격입니다. 합격! 그것도 전 과목을 합격하였습니다.” “뭐라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질 못하고 눈물이 흘렸습니다.

“왜 진작 알려주질 않고 그러십니까.”라고 하자 내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아내가 일부러 장난을 쳤던 것이었습니다. 어찌됐든 합격했으니 좋다 무조건 좋다 오늘저녁 멋지게 내가 한 잔 산다며 모두 함께 나섰습니다.그날 우리는 1, 2, 3차 아니 나중에는 어디까지 갔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아마 구미시내 술집이라는 술집은 다 헤맸었던 것 같습니다.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내의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여보! 고맙소. 무조건 고맙소. 오늘의 이 영광을 하느님에게, 그리고 이 합격증을 당신에게 드리리다.”라며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아내도 말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비치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아른거리는 아내의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고 마치 하늘이 내려주신 마음 착한 천사로 보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그간의 서러움에 합격증을 번갈아 만져보며 밤새도록서로 부둥켜안고서 울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새벽녘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에 살며시 일어나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아내의 두 손을 살며시 잡아 가볍게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나란히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나는 어느새 백마를 탄 기사가 되어 아내를 안고서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습니다. 어느 결 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나의 품안에서 살며시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나는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하였습니다.

“아내야, 아내야 사랑하는 내 아내야 너를 만나 내 어이 오늘을 잊을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두리둥실 두둥실 얼싸안고 춤을 추며 한평생 살자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기러기 떼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우리들이 부러운 마냥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욱더 신이 나서 마치 개선장군마냥 이럇! 하면서 더욱더 힘차게 달렸습니다, 아~ 하느님 제발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게 하소서. 꿈에서 깨지 않기 위해 마구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동녘에는 어느새 찬란한 태양이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나는 좀처럼 흥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서울대에 합격한 마냥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에 현수막이라도 내걸어 실컷 자랑도 하고 싶었으며 지방신문에라도 대문짝만하게 얼굴을 실어 전국의수많은 만학도를 대표하여 큰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기필코 해냈고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고.’

 

정 태 하

고입,대입 국가 검정고시 합격
김천대학교 전자통신과 졸업
국립금오공과대학교 산업대학원 수료
서울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경영학전공 졸업

저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수상
자랑스러운 신,한국인 선정 대통령상 수상
자원봉사부문 유공교정위원 법무부장관상 수상
                                                         자원봉사부문 유공교원 교육부장관상 수상
 

당선소감

오늘 문득 세월의 뒤안길에서 50여 년 전 고향을 떠나 무작정 이곳 구미땅을 디딘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60을 지나 황혼 길에서 저녁노을을 마주하니 인생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만에 한없이 펼쳐진 낙동강변을 걸어보았습니다, 싱그럽게 펼쳐진 가로수를 누비며 하얗게 피어나는 뭉개구름을 쳐다보니 모두가 언제인가 싶습니다.

그 옛날 지독한 가난 속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낯선 타향에서 추위와 배고픔, 배우지 못한 설움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눈물로 지새웠던가. 내 인생에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결단과 고행이 주어진다면 그때와 같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용기가 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나 자신에게 반문해 봅니다.

생각하면 어떻게 그 어렵고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 뒤돌아보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고생 뒤에는 영광이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저는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모진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오늘이 있기 위해 참으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또한 보람된 길을 걸었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속담에 저 또한 그 어려운 역경과 고난을 견디어 왔으며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격언 또한 저를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걷게 하여 주었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게 죄인이 아니고 그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저는 ‛하면 된다!’라는 이 구절을 지금도 우리 상록학교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심히 만학에 불타고있는 모든 학생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이제는 배우지 못한 설움을 모두 저 뭉게구름에 실어 보내고 어두운 그늘속에서 몸부림치는 우리 상록학교 청소년들과 배움을 갈망하는 성인문해학습자와 늘 함께 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 길이라면 언제라도 달려가겠습니다.

저는 이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저의 분신인 구미상록학교와 아이들을 제 가슴속 한편에 영원히 묻을 것을 약속드리며 오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싱그러운 햇살을 가르며 힘차게 페달을 밝으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미력하나마 언제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어 늘 푸른인간 상록수로 길이 남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 심사위원 박종민(수필가)

인생 삶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한편의 드라마이리다. 사람에게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없다면 그건 생(生)이 무의미하리라. 여기 정태하선생의 인생 삶 역시 한편의 드라마틱한 소재의 극본(劇本)이고 소설이며 수필과 시(詩)기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정태하선생은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자기가 살아온 인생 삶의 역정(歷程)을 간결하게 기술해 내며 진솔하고 신선한 스토리로 표출해 냈다. 글의 전개나 맺고 끊김이 구김살 없이 부드럽고 맛깔스럽다. 아울러 글이 내포하고 있는 힘과 매력으로 그 자신만의 꿋꿋한 의지와 용기와 사랑과 집념이 그대로 나타나있다.

정태하 선생의 이 글은 짧은 소설과도 같은 수필로서의 문장 문맥이 구성되면서 전혀 난해(難解)하질 않고 소박(素朴)하다. 그는 글을 통해 그 자신만이 가진 통찰력과 사고력으로 인간으로서의 보고 느끼며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설움 아픔 그리움 즐거움을 소소하게 담아내면서 어려움에 처한 현실을 극복해 열어나갈 희망과 비전을 함께 제시한다.

글이 구성 하고 있는 전체 문장의 배치와 흐름이 다소 투박하다고 할 수도 있는 문맥이지만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매력과 힘이 있다.

정태하 선생의 작품을 채택(採擇)하는 데 심사위원 일동의 의견이 일치했다. 신인상 당선을 축하한다. 여건이나 지면상 40여 페이지에 이르는 긴 내용의 글을 모두 옮기지 못함이 마냥 아쉽다.

정태하 선생은 오늘을 계기로 수필가로서 활약하게 됐다. 앞으로 훌륭한 수필가로서의 왕성한 활동이 기대되는 바이다. 건필(健筆)을 기원하며 기도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