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이지만 모든 발언이 막연해 
기승전 안타깝다
박근혜식 모호한 화법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같은 친박으로 분류되는 김진태 의원조차 황교안 전 국무총리에게 “어정쩡하게 답변하니 결정 장애라는 비판도 있다”고 말했다. 황 전 총리가 당내 화합, 난민, 광주형 일자리 등 모든 사안에 “신중하게” 또는 “바람직하게”라는 답변으로 일관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의원이 이를 대놓고 꼬집자 황 전 총리는 분명하게 말할 사안과 신중해야 할 사안이 따로 있다면서 피해갔다.

19일 오후 TV조선을 통해 진행된 자유한국당 당대표 후보 3차 토론회에서 김 의원이 황 전 총리의 모호한 화법에 대해 지적했다. 

김 의원은 “국무총리의 답변 같다” “역시 예상했던 답변이다” “칼로 자른 듯 모범 답안”이라고 묘사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모호한 화법을 구사한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실 전날(18일) 오후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대구경북권 합동 연설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 전 총리는 연설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엉터리 경제 정책을 막아내고 △자영업자를 일으켜 세우고 △정책 투쟁을 벌이고 △끝장 투쟁에 나서고 △안보를 지키고 진짜 평화를 만들고 남북 대화의 원칙을 세운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공약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황 전 총리는 토론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불가피했는지에 대한 OX 공통 질문을 받고 X를 표하면서 “법원에서 사법 절차가 진행되는 중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다. 이 부분에 절차적 문제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 진실이 명확하지 않은데 정치적 책임을 묻는다고 쉽게 탄핵을 결정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박 전 대통령이 돈 한 푼 받은 것이 입증되지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탄핵이 타당한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헌재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고 따지자 황 전 총리는 “기본적으로 헌재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을 말씀드린 것”이라고 답했다.

당시 박영수 특별검사의 수사 등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 절차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헌재의 탄핵 인용은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했으면서 헌재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덧붙이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18일 열린 한국당 대구경북 합동 연설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황 전 총리. (사진=연합뉴스 제공)

광주형 일자리 문제에서 김 의원은 황 전 총리의 모호한 화법을 환기했다. 

김 의원은 비판적인 답변을 예상하고 물었는데 황 전 총리는 “기본적으로 임금에 관한 문제와 근로조건에 대한 문제는 노사 간에 합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김 의원은 “광주형 일자리와 협력이익공유제에 문제가 있으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답변을 원했는데 어정쩡하게 답변하니 결정 장애라는 비판도 나온다”며 “정치는 신중하게 답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택의 순간도 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황 전 총리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상황에 맞는 답변을 했다. 곡해없길 바란다”고 대응했다. 

내용없는 발언은 바른미래당과의 통합 문제에서도 부각됐다. 

황 전 총리는 “바른미래당이 내거는 가치와 한국당의 가치가 부합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헌법의 가치,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 질서,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충분히 공유한다면 양당 간 합당도 가능하고 개인 입당도 가능할 것이다. 한국당은 폭넓게 문을 열고 헌법 가치에 충실한 인재들이 함께 모이는 흩어지는 정당이 아니라 모이는 정당을 지향한다. 다양한 방법의 통합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대한민국 원내 정당 중에 헌법 가치, 자유 민주주의적 질서,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황 전 총리는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어떤 분야에서 무슨 가치가 부합되는지 설명하지 않고 모든 정당을 포괄할 수 있는 거대 담론 차원의 통합론만 강조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토론에서도 모호한 화법을 유지하고 있는 황 전 총리. (사진=연합뉴스 제공)

지난 2017년 조기 대선 정국에서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과 여러 대목에서 비슷하다는 악플에 대해 황 전 총리가 코멘트를 했는데 역시 구체성이 결여됐다.

황 전 총리는 “반 총장은 굉장히 훌륭한 분이고 우리나라가 배출한 국제적 인재 아니냐. 나와 반 총장은 공직 경력도 다르고 일해온 경력도 다르다. 나는 일단 정하면 끝까지 이뤄왔던 길을 걸어왔다”며 중도 포기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의 중도 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유력 인사가 별다른 검증없이 정치적으로 단기간에 급부상하는 현상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반 전 총장이 “기름장어”라는 나쁜 평가를 받았듯이 황 전 총리의 피해가는 정무적 대응 태도 역시 유사한 것 아니냐는 비판적 지점을 읽을 필요가 있다.

황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께서 구속된 것은 안타깝다”면서도 “내가 그 (수인) 번호까지 기억하면서 되새길 이유가 없다”고 이는 박 전 대통령과 선을 긋는 발언으로 읽혀지는데 이전에 친박 표심을 달래기 위해 보였던 행보와는 일관되지 않는다.

예컨대 황 전 총리는 유영하 변호사 발 배박 논란이 일자 지난 9일 경북 구미 故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찾아서 “(박 전) 대통령께서 그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최대한 잘 도와드리자고 했다. 실제로 (박영수) 특검이 수사 진행 중일 때 1차 수사를 마치고 더 조사하겠다고 수사기한 연장을 요청했다. 그때 내가 볼 때는 수사가 다 끝났다. 이 정도에서 끝내자라고 해서 수사기한 연장을 불허했다. 그것도 했는데 지금 얘기하는 그런 문제(대통령 권한대행 때 구치소 내 책상 의자 반입 불허 및 수인 번호 모름)보다 훨씬 큰 일을 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어찌보면 황 전 총리가 대권 주자 지지율 1위로서 친박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도리어 친박 표심을 달래는 스탠스를 취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17일 방송된 채널A <외부자들>에서 황 전 총리의 모호한 화법에 대해 “두 개를 한 꺼번에 다 가질 수는 없다. 이분은 두 개를 다 가지려고 하는 거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게 되면 저쪽에 과격한 사람을 쳐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하고) 저거(극우 지지)를 가지려면 또 정치적 올바름을 갖지 못 한다. 그러니까 말이 그렇게 (모호하게) 나가는 것이다. 이게 혼자서 얘기할 때는 괜찮은데 토론회에 나가면 바로 추궁당한다. 그러면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든 간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황 전 총리는 자기 논란이나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는 사안에 대해 매번 ‘기승전 안타깝다’는 반응으로 일관하지만 친박 또는 극우적 표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확실한 메시지를 던져왔다고 볼 수 있다. 

지난달 21일 대구 여성 정치아카데미에 참석한 자리에서 황 전 총리는 기자들에게 “통합진보당을 해산한 사람이 누구냐”라고도 했는데 이 지점도 그런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김진태 의원은 강성 보수로 나가고 있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개혁 보수와 중도 공략이라는 확실한 전략이 있지만 황 전 총리는 보수 대통합론을 내세우면서도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진태 의원은 강성 보수로 나가고 있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개혁 보수와 중도 공략이라는 확실한 전략이 있지만 황 전 총리는 보수 대통합론을 내세우면서도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황 전 총리는 지난 13일 국회에서 5.18 망언 사태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 번 조사가 있었던 거 같고 지금은 하이튼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다. (북한 개입설에 대해) 이미 결정돼 있던 부분이 있었고 그걸 자꾸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망언 당사자 3인 김순례·김진태·이종명에 대한 징계 요구에 대해) 그것도 윤리위원회에서 여러 의견들을 수렴해서 잘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갈등들이 조속히 잘 정리가 되고 또 우리가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게 되길 바란다.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어쨌거나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모 기자는 오죽 답답했던지 “이제 앞으로 당대표가 될 건데 좀 더 확실하고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닌지”라고 뼈있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전여옥 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가 멀어졌는데 2012년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적 식견, 인문학적 컨텐츠도 부족하고 신문 기사를 깊이 있게 이해 못 한다. 박근혜는 늘 짧게 대답한다. 말 배우는 어린 아이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고 혹평했다.

예컨대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11월8일 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한중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지금까지도 우리 한중 관계는 협력적 관계로 이렇게 발전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지속이 될 것이고 더 업그레이드시켜 나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렇게 협력을 이뤄왔지만 그 관계가 더욱 이렇게 지속이 되면서 또 나아가서 더욱 업그레이드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그 중요한 협력적 동반자이기 때문에 이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나가고 업그레이드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세 차례나 동어 반복했다. 컨텐츠가 부족할수록 원론적인 화법과 동어 반복을 일삼게 되는데 전 전 의원은 이를 베이비 토크라고 규정했다. 황 전 총리의 화법도 이와 비슷하게 보여진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권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등 유력 정치인의 반열에 올랐듯이 황 전 총리 역시 대세론을 형성하면서 비슷한 코스를 밟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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