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의 기자회견
정신대와 위안부 섞으면 안 돼
비극적인 피해 증언 
이용당한 억울함과 분노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용서 안 했다
죗값 달게 받아야 
한일 학생들 간의 교류와 교육
전세계 여성들에 대한 미안함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이용수 할머니는 거듭해서 기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할머니는 “기자 여러분들 부탁한다. 꼭 했던 말 그대로 (보도)해달라. 없는 말 추측해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나를 욕보이는 말이다. 기자 여러분들이 이것을 옳은 말씀으로 기사를 내주셔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25일 14시40분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호텔에서 2차 기자회견을 열었다. 할머니는 42분간 쉬지 않고 억울했던 심정을 토해냈고 16분간 질의응답을 소화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할머니는 발언 말미에 “(원래 정해진) 장소를 바꾸라고 했다”며 “장소가 너무 좁아서 내가 바꿨다. 그 좁은 데서 하면 코로나19가 퍼진다고 하는데 걱정이 돼서. 여러분들을 큰 곳으로 모셨다. 그 점을 양해하고 꼭 기사는 있는 그대로 내달라”고 당부했는데 그만큼 언론을 향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간절했다. 

당부대로 할머니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①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위안부는 다르다
②피해 증언 
③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당한 억울함과 분노 
④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용서를 하지 않았음 
⑤죗값 달게 받아야 함 
⑥이용당한 故 김복동 할머니(1926년~2019년) 
⑦한일 학생들 간의 교류와 교육의 중요성 
⑧전세계 여성들에 대한 미안함 

할머니는 미리 준비한 기자회견문을 들고 “이걸 카메라로 찍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대본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77년간 응축된 이야기를 풀어냈다.

먼저 ①에 대해 할머니는 “정대협은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은 정신대가 (대상으로 지원)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와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다르다.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하고 위안부 할머니는 간 데가 다 다르다”고 강조했다.

사실 이 문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지적돼왔다. 

김찬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지난 13일 블로그를 통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전혀 다른 것인데 정대협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고는 위안부 내용으로 오랫동안 활동을 했다”며 “많은 국민들이 정신대 숫자를 위안부 숫자와 혼동하게 만드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아직도 두 개를 혼동하는 국민이 많다. 이후 정대협은 이름을 정의기억연대로 바꿨다.​ 하지만 애초에 이름부터 잘못된 단체였다는 것을 자기 반성하는 글이나 말을 들어보지 못 했다”고 비판했다.

단순히 근로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않은 잘못만 있는 게 아니다. 단체명은 정대협인데 실제 활동 내용은 위안부로 하면서도 성착취 피해를 입은 여성을 소녀의 이미지로 고착화시켰다.
 
김 대표는 “전국에 수 백개는 만들었을 소녀상은 민족의 순결한 처녀 이미지”라며 “어린 나이에, 의지에 반하여, 끌려갔어야 그들이 세워놓은 이상적 위안부 기준에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평균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끌려갔 건 자의로 갔 건 속아서 갔 건 알고 갔 건 모두 제국주의 지배 하의 피해자이고 구조적인 여성 수탈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사진=연합뉴스)
할머니는 이날 예정된 14시에서 40분 가량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사진=연합뉴스)

②은 할머니가 다른 이야기를 하시다가 중간 중간에 섞어서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할머니는 “(1928년생으로 1942년도에 강제로 끌려가서) 우리 나이로 하면 열여섯살 만으로 하면 열네살이다. 나는 양력으로 돼 있다. 왜? 그때 성을 갈지 않으면 배급을 안 줬다. 그래서 성을 갈았다. 학교는 일본 학교다. 내가 3~4학년까지 다녔다. 그래서 가타가나를 알았다”며 “끌려가서도 대만 가미카제 특공대 부대로 끌려가서도 그 장교가 가타가나로 이래 써줘서 대화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끌려가서 당하는 것을 말로는 못 한다. 내가 쭉 30년 동안 (②을) 해오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이 증언을 했다”고 밝혔다.

특히 할머니는 “내가 왜 팔려야 하는가? 여러분 생각해보라. 아들들과 딸 하나(5남1녀)였다. 우리 부모는 쌀 한움큼 물려가지고 엄마가 소매에 감춰서 이리로 온나 해서 먹이고 했다. 이런 남의 집 귀한 딸을 밤에 그것도 끌고 가서 대만(에 있는 일본군) 가미카제 부대에 데려가서 방에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 가서 전기고문과 가진 칼을 가지고 이렇게 죽여놨다”며 “그 군인을 보니까 거기 들어가라고 해서 안 들어간다고 하니까 그냥 머리를 질질 끌고 가서 방 안에 자물쇠가 큰 게 달렸었다. 그걸 깨서 문을 확 열어서 확 밀었다”고 묘사했다. 

이어 “또 발로 그것은 돌덩이보다 더 위험한 군홧발이었다. 허리를 발길로 차서 엎어졌는데 너무 너무 배가 찢어지도록 죽도록 아프고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빌면서 살려달라고 했다. 머리를 놓고 앉혀서 두 팔을 놓고 하는 데가 있는데 (거기에 양팔을) 감고 했는데 그때 내가 엄마라고 크게 불렀는데 이걸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금도 들린다”며 “이걸 왜 그런지 누구한테라도 말할 수 없었다”고 호소했다. 

나아가 할머니는 △독립운동까지 한 친오빠가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당한 사연 △자식들을 원통하게 보낸 부모님 이야기 등을 풀어냈고 “여러분들 직접 피해자가 아니라고 안심하면 안 된다. 조상들이 다 끌려갔고 대한민국의 형제자매 이런 사람들이 다 그렇다. 여러분들이 지금 감을 갖고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서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 교육을 시켜서 이 위안부 문제 강제연행 문제를 해결 안 하면 안 된다. 대대로 간다”고 호소했다. 

③과 ④이 핵심인데 할머니는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정의연과 윤 당선인에 대한 의혹사항들은 검찰이 결론을 낼 문제라고 밝혔다. 

동시에 자업자득의 관점에서 ⑤을 누차 거론했지만 구체적으로 윤 당선인의 의원직 사퇴에 대해서는 “그것은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퇴를 하든지 말든지 나는 말 안 하겠다. (원래부터) 자기 맘대로 다 했으니까”라고 일축했다.  

③은 크게 보면 ①을 섞어서 △위안부 피해 사실 이용 △위안부 할머니들을 과도하게 피해자화하고 모금에 동원 △전략없이 사과와 배상 타령 등으로 압축된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내가 왜 성노예인가? 그 더러운 성노예 소리를 왜 하는가라고 했는데 미국 사람 들으라고 한다더라. 이렇게 팔아서 뭘 했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할머니는 “정대협을 몰랐다. 내가 1992년도 6월25일 신고를 할 적에 윤미향은 간사였다. 29일에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갔다. 어느 교회더라. 교회에 갔었는데 그날 따라 일본 어느 선생님이 정년 퇴직을 하고 돈을 천만엔인가? 줬다고 하면서 100만원씩 나눠줬다.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모금을 하는 걸 봤다”고 운을 뗐다. 

이어 “왜 모금을 하는지 그것도 몰랐다. 따라다니면서 모금하는 데에 보니까 농구선수들이 농구하는 걸 기다렸다. 그 농구선수가 돈을 들고 모금을 하더라. 그 돈을 받아오더라. 나는 그게 왜 그런지 몰랐다. 당연한 그런 건가 보다 했는데 좀 부끄러웠다”며 “저렇게 이기려고 애를 썼는데 버젓이 (모금액을 받기 위해) 앉아가지고 있는데 좀 시간이 늦었다. 배가 고픈데 맛있는 것을 사주라고 하니까 돈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것이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발언을 하던 중간에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결론적으로 “어디가도 교회에 가도 또 돈을 주면 그걸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그런 걸 잘 모르고 쭉 30년을 해왔다”고 밝혔다.

나아가 할머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 생명을 걸어놓고 끌려간 이 위안부를 왜 자기가 정신대 할머니와 합해서 쭉 이용해왔다. 나는 그것도 당연한줄 알았다. 어제 내가 생각하니 이럴 수가 있나”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어 “어제 한 숨도 못 잤다. 왜 뭐 때문에 정대협이 그것(근로정신대 권리 회복 운동)만 하지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만들어서 사용하는가. 이것을 생각하니 자다 일어나서 펑펑 울었다”며 “왜 내가 이렇게 당하면서 여태까지 말도 못 했나. 생각하니 그래 내일 기자회견에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 되겠다”고 발언했다.

무작정 반일 정서에 편승해서 일본 정부에 아무 실효성없이 요구하는 것도 문제다.

할머니는 “30년 동안 앉아가지고 얘기하는 게 사죄하라 배상하라 하는데”라며 “일본 사람이 뭔줄 알아야 사죄하고 배상하지. 일본 그 사람들이 바보인가? 뭣 하러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를 하는 데에 거기가 해당치도 않는데 뭣 하러 일본 사람들이 사죄하고 배상하겠는가. 안 하는 이유를 나는 알았다. 이것 또한 뭔가. (결국 사진만 찍고) 이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고 성토했다.

이어 “30년 동안 해나가면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학생들까지 고생을 시켰다. 그 학생들 돼지저금통 털어서 나오는 그 돈도 털었다”고 주장했다. 

할머니는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저 사람이 받아먹었다. 30년 동안 재주했다”고까지 표현했다. 

④ 문제는 윤 당선인이 19일 밤 일방적으로 할머니가 있는 대구로 가서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간청한 일이다. 그 직후 할머니가 용서를 해주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언론 보도가 쏟아졌지만 20일 한겨레의 단독 보도로 용서한 적이 없다는 할머니의 의중이 알려졌다.

할머니는 “(5월7일 1차 기자회견을 하기 전에 윤 당선인과 전화통화를 해서) 이러면 안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기자회견 하련다고 했다. (윤 당선인이) 당당하게 큰 소리로 기자회견을 하라고 해서 내가 5월7일날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이런 등등을 하나 하나 말씀을 못 드리겠다”며 “국회의원으로 나올 적에 전심전력으로 다해서 내가 도와준 것은 없지만 가보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따구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이어 “어느날(19일) 저녁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문을 열어주라고 해서 열어주니까 윤미향씨가 확 들어오더라. 내가 놀래서 넘어갈 뻔했다. 그러면서 와서 무릎을 꿇고 무슨 말인지 용서? 뭘 용서를 하는가? 뭐라도 가지고 와야 용서를 한다. 뭐를 용서? 보니까 엄청나더구나”라며 “그것은 검찰에서 할 것이고 내가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할테니 그때 오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그때 윤 당선인과 동석한 교수가 한 명 있었다.

할머니는 “교수라고 한 사람이 있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 내가 말은 안 하겠다. 뻔뻔스럽게 차에 내려서 휠체어를 타려고 했는데 뭣이 어쩌고? 도대체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사람이 윤미향을 보필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때 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거기서 무슨 원수진 것도 아니고 30년을 지내왔다. 한 번 안아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안아주니 나도 인간이다. 사람이다. 30년을 같이 했으니까.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눈물이 왈칵 나서 맘껏 울었는데”라며 “기자들 부탁한다. 명백하게 좀 기사를 내달라. 그걸 가지고 용서했다? 이런 기사 너무 황당하다. 그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할머니는 재차 “이것은 확실하고 명백히 여러분들(기자들)에게 다 책임이 돌아가는 일”이라며 “(윤 당선인이 그동안) 자기 맘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팽개치고 했는데 뭘 용서를 구하는가. 이름도 성도 없는 용서? 자기 맘대로 했으니까 이것도 자기 맘대로 하든지 말든지 하는 거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뭐 때문에 용서를 바라는가. 그것 아니라도 여러 수십 만가지를 다 말씀을 못 드린다”고 피력했다. 

질의응답을 시작하기 직전 할머니는 할 말이 더 남았다며 “안산이란 데도 봤는데 쉼터를 화려하게 지어놨더라. 그 위대한 윤미향 대표 그 아버님이 살았다고 하더라. 이런 것은 검찰청에서 다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발언을 하면서 적극적인 손짓을 동원한 할머니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할머니는 ⑥에 대한 것도 문제제기했다.

할머니는 “김복동 할머니는 한 쪽 눈이 실명이고 한 쪽 눈만 조금 보이는데 김 할머니를 미국으로 어디로 끌고 다녔다”며 “할머니 있을 때 잘 해야 하는데 고생시키고 이용해먹고 뻔뻔스럽게 묘지에 가서 눈물 흘리더라. 그것은 가짜의 눈물이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이런 것은 죄인데 죄인 점을 모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⑤으로 정리를 했다.

할머니는 “정대협에서 위안부를 이용한 것 가지고 한 것은 도저히 용서 못 한다. 이것 또한 벌을 받아야 한다”며 “이런 걸 모르고 아직까지 큰소리하고 있는 이 사람들 죄는 지은대로 간다. 이 죄를 물어서 죗값을 살려야 한다. 이후에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서는) 아직도 그 사람(윤 당선인)은 자기가 잘 했다고 당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할머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⑦이다. 

22일 출고된 월간중앙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할머니는 13일 대구에서 문상덕 기자와 만나 “개인적인 원망이나 분함은 없다. 내 잇속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는 다른 방식의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할머니가 지적하는 것은 너무 일본과 적대적으로만 나아가고 절대악으로 상정하는 운동권적 방식의 전환이다. 동시에 한일 양국 학생들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하고 한일관계도 지금과 같으면 안 된다. 하지만 전자로만 너무 치중돼 있다 보니 후자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는 게 할머니의 판단이다.

할머니는 기자회견에서 “데모 방식을 바꾼다는 거지 (수요집회를) 끝내는 건 아니”라며 “다시 새롭게 좀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걸 하기 위해서 바꾼다고 했다.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다. 학생들이 결국 그 나라의 주인 아닌가. 이 학생들이 알아야 사죄와 배상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라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 아베는 거짓말만 한다. 그래놓고 한국이 거짓말 한다고 한다. 이렇게 나오니까 일본 학생들도 그걸 모르고 한국이 거짓말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이 서로 왕래하면서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학생들이 뭐 때문에 사죄하라고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걸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시일이 걸려도 서로 왕래하며 지내면 속에 할 말도 있고 배워야 알게 된다. 그래서 내가 짧은 생각이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할머니는 “이것은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해야 한다”며 “양국이 친하게 지내면서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이니까 올바른 역사 교육을 시켜가지고 이 억울하고 누명 쓴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을 해결해줄 사람들은 우리 학생들”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⑧은 반인륜 범죄를 알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 인해 모든 여성들에게 덧씌워질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할머니의 죄스러운 마음이다.

할머니는 “왜 이렇게 당해야 하고 늙어서까지 사는 게 죄인가. (울분을 토하며) 끝까지 당한 내가 너무 부끄럽다. 하늘 나라에 가서 할머니들에게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다. 언니 동생들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으니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려고 한다”면서 “이것(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리고 사죄를 이끌어내는 일)이 세계의 여성들께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다. 세계의 여성 여러분들 저희가 위안부지만은 여성이라는 그 두 글자가 너무 미안하다. 이 기회를 통해서 모든 여성들께 정말 미안하다”는 뜻을 표했다.

이어 “세계 여성들에게 이 확실한 위안부가 여러분들의 여자라는 두 글자에 손상을 입혔다는 것에 참으로 죄송하다는 것을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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