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의 장터기행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예부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상업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오고 가는 소통의 장소로 문화창달의 랜드마크였다. 여기에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의 중간자 역할을 해왔던 보부상 역시 한국 유통업의 시작을 알린 주역으로, 오늘의 상업문화 성장에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장의 급성장으로 이 같은 전통시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에 본지는 우리의 전통시장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미래세대의 문화 전달을 위해 베스트셀러 '악어새'의 저자 이재인 소설가의 ‘악자지껄 장터 별곡’을 새해 기획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주]

(사진=이재인 소설가)
(사진=이재인 소설가)

우리가 자라날 때 시골의 장날은 바로 축제날이었다. 시장 끄트머리에 밀짚멍석위에서 유랑극단이 틀어대는 확성기 소리 대전발 영시 50분이었다. 그것은 ‘대전부르스’이다. 이 부르스는 장판에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이 노래 소리는 장꾼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노동에 지친 농민들에게는 활력제이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는 장날은 다 같이 기다렸던 기회의 날이었다.

장날은 축제날이었어!

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리던 그 날에는 엄마 따라 새 고무신을 사게 되었다. 장판에서 덤으로 눈깔사탕을 하나 입 안에 넣는 날은 더없이 행복했다. 어른은 어른대로 땀 흘려 수확한 곡식을 내다 팔았다. 그 돈으로 간간한 생선 몇 마리를 사들곤 군침이 돈다. 조상 젯상에 올릴 제물도 사고, 농사꾼은 저마다 봄, 여름, 가을에 소진된 에너지를 채울 요량으로 여기 저기 생선전을 기웃 거렸다. 이런 사람들로 생선가게는 오전 10시부터 북새통이다.

고무신을 때우는 신기료 아저씨

인구는 많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어려운 그 시대에는 시장판은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고무신을 때우는 신기료장수, 튀밥을 튀기는 뻥튀기장수, 고무줄과 얼레빗을 판다는 목판장수, 엿을 먹다가 너무 달아서 죽을 뻔 했다는 엿장수가 처음이 아닌데도 가위소리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 시끄러운 북새통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냄새가 여기저기에서 물씬 풍겨났다.

청승맞은 타향살이, 비단장수도 나타나

온종일 지치지 않고 떠들어대는 유랑극단이 배꼽을 뺄 것처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당대의 만담가 장소팔, 고춘자만이 웃기는 게 아니었다. 장작을 파는 지게꾼 지게위에 탑골공원처럼 아슬아슬하게 올려쌓은 나뭇짐도 위태위태해 보였다. 초장부터 막걸리 몇 잔에 취한 튀김 장사는 청승맞은 타향살이 넋두리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타고난 재주가 돋보였다. 

총각이 어쩐다구...
장가를 못간 농촌 총각은 어머니를 따라 장구경온 아가씨들의 긴 말총 같은 머리꼬리를 슬금슬금 훔쳐보면서 지나가곤 했다. 내외를 심히 가리는 양반집의 아가씨라도 옷 파는 가게 앞에서는 속옷을 들썩들썩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풍경도 이색적이었다. 관음증 환자나 야한 사내가 아니더라도 옷장수 거울 앞에서는 보기만으로 금단의 성역이었다. 시집갈 처녀는 비단장수 왕서방의 좌석 앞에서 시댁 일가친척에 가져갈 예단 값에 가슴 졸이는 표정도 엿볼 수가 있었다. 

이렇게 시골 장은 낭만도 사랑도 추억도 고루 지니고 있었다. 이때 국적 불명의 놀이패가 등장하여 장터는 순식간에 불이 난 호떡집처럼 열기가 치솟았다. 비누장수, 책장수는 아직까지 마수걸이 개시도 못했는데 놀이패 등장으로 오늘장 대목은 망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먹을거리 풍년마당이었다. 찐빵, 엿장수와 전병을 파는 장사꾼이 바람결 맞은 범선처럼 어깨가 들썩거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그런데 말이 놀이패였지 팔도 탈춤을 잘라먹고 티를 섞고 석이여 사설을 풀었다. 비꼬고 질퍽한 농지걸이가 추가되어 웃음거리로 흥미를 이끌어냈다. 이윽고 얼굴에 탈을 쓴 사내가 나와 춤을 추다가 장꾼들 앞으로 후딱 폴짝 ‘어흥!’ 하곤 무섭게 대어든다. 이때 말뚝이가 나와 양반 허리춤을 잡고 희롱하고 골려댄다. 미얄 영감과 덜머리잡이까지 등장하여 춤을 추고 이년, 저년 삼각관계로 다툼을 벌여 장판을 시끄럽게 했다. 그러다가 각설이 타령이 쏟아졌다.

일자나 듣고보나 일월이 해송송 
밤중에 샛별이 완연하네
하늘삐딱 쳐다보니 
북두칠성 돌아갔네
어절씨구 잘헌다 
품바나 품바가 왔어
이자나 한 장들고보니 
진주기생 의암이는
우리나라 섬길라꼬 
왜장청정 목을안고
진주 남강 떨어졌다 
품바나 품바나 얼씨구나

말이 탈춤이지 목구멍에 쌓인 한을 풀어내는 사설 솜씨가 봉산탈춤이나 서산 박첨지 놀이패를 능가하는 해학이 가히 나무랄 데가 없는 구성이었다. 놀이패 투전 바가지에 지폐가 가득 쌓이자 그들은 삽시간에 밀짚방석을 말아들고 마차에 실었다. 드디어 장판은 바람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장꾼들이 슬몃슬몃 자리를 떠났다. 장꾼들이 아차 놓칠세라 생선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저기 물 좋은 생선들이 좌판 위에서 눈을 흘긴 채 누워 있었다. 동태, 가자미, 갈치, 망둥어, 숭어, 갯장어 등 사돈에 팔촌이 넘는 갓가지 생선이 주인을 기다리는 풍경이 시골장의 어물전이었다.

서해 바다가 인접한 내포에서는 갓가지 이름모를 바닷고기 한 마리가 겉보리 한되박 값이라는 데 놀랬다. 장사꾼은 그냥 내버리기 아쉬워 헐값에 건네면서 낙망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도 장꾼들은 생선장수의 눈치를 보았다. 
“깎아 달란 다구요? 이 생선 놈들은 수염도 머리털도 없수다. 됐슈...”
“됐다면 얼른 주지... 갈 해는 노루꼬리만혀 집에 갈라면 삼십 리가 넘는디...”
장꾼이 해지기 전에 가야겠는지 눈치 없이 독촉을 했다.
“이것 가져가 삶아 개나 줄라구...”
“아니 됐다구 허구선 손한테 그게 무슨 대꾸가 그려?

생선가격을 깎으려다 그만 팔지 않겠다는 말로 ‘됐슈’라 했으니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충청도 사람들의 말은 이렇게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속이 깜깜이를 표현하기를 ‘넉 잡고 먹은 만치 주시유,“ 라는 말도 타지 도시민들에게는 이해가 안가는 말이었다.

뭐가됐수?
생선장수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장꾼이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을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야 알아차렸다. 생선장수는 본인이 학산 이 씨라고 자부심 내세우던 자신이 생선장수라고 말을 했던 탓에 냉정하게 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김해 김씨, 김수로왕 후손이라서 눈 아래로 깔보는 습성을 저쪽에서 비록 생선 장수라 하더라도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골 농투성일진대, 자신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은연중 꼬리를 숨기면서 조상님들 권위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해는 서산에 빠지고 장꾼들이 떼 지어 으미고개를 넘는 소리가 왁작 지껄해지자 길목을 노리고 숨어있는 강도가 슬밋슬밋 바위 뒤로 숨어들었다. 소팔은 기미를 눈치 채고 그것을 탈취하려던 놈들이 장꾼들의 무리에 그만 기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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