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의 장터 기행

[중앙뉴스= 신현지 기자] 예부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상업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오고 가는 소통의 장소로 문화창달의 랜드마크였다. 여기에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의 중간자 역할을 해왔던 보부상 역시 한국 유통업의 시작을 알린 주역으로, 오늘의 상업문화 성장에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장의 급성장으로 이 같은 전통시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에 본지는 우리의 전통시장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미래세대의 문화 전달을 위해 베스트셀러 '악어새'의 저자 이재인 소설가의 ‘왁자지껄 장터별곡’을 신년 기획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엿가위 (제공=이재인 소설가)
엿가위 (제공=이재인 소설가)

이 마을 저 마을 통신원

아카시아 하얗게 핀 보리밭 샛길로 오늘도 두메산골에 엿장수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왔다. 엿장수가 밀고 오는 리어카 속에는 삐루병(술병) 신발짝, 찌그러진 양철 함지박이 들어있다. 엿판 위에는 댕댕이 덩굴로 짠 고리짝에 고만고만한 엿가락이 밀가루를 둘둘 말곤 엿판에 얌전하게 누워있다. 아이들에게 엿장수는 큰 인기가 있다. 물론 어른한테도 싫지 않은 손님이다.

이 엿장수를 통하여 궁금해 하였던 등 너머 사돈댁 길흉사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가 있었다. 엿장수는 일테면 원근 일대의 통신원이다. 산 넘고 물 건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더러는 중매를 서는 일도 있었다. 혼사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두루마기 한 벌쯤 선사받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일거양득 엿장수한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그 댁에 신붓감은 머리에 얹은 금은 장식품은 없지만도, 훌륭한 몸가짐 하나는 청사에 기록될만하거든유...”

엿장수는 넉살좋게 ‘가재는 게편’이라더니 자기 8촌 여동생을 은근하게 자랑삼아 건넸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가문은 구리지 않는 법. 듣는 사람 또한 싫지 않은 뉴스로서 그 전달은 미덕이었다. 엿장수는 엿 타령 삼아 흥얼거렸다.

“자아, 총각이 먹으면 장가들고, 츠녀가 먹으면 시집가는 물건이 엿인디 엎어지면 옥동자요, 바라보면 엿판이오. 자아, 오늘가면 낼이 다기 오기 힘든 장수가 또한 이 엿장수라...”

엿장수는 자기가 낼 또 온다는 거짓말에 마을 사람들도 믿지 않는다. 더구나 엿장수가 접지해둔 물색들은 분홍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는 처녀가 있다는 소문이 나돈 지 오래였다. 그러니 지금 엿을 먹지 못하면 사설에 어린애들조차 고양이 죽은데 쥐 눈물만큼도 섭섭지 않는다.

"워쩌긴 워쩐대유 항께 살면돼쥬"

엿장수는 덕이 누나가 빨랫줄에 옷가지를 널고 있는 모습을 훔쳐본다. 채마밭가에서 덕이 누나를 훔쳐보면 가슴이 설렌다. 엿장수는 신세타령을 섞어 엿장수 가위소리에 얹었다. 덕이 누나는 성난 얼굴로 엿장수를 흘겨보았다.

“여봐유, 내 신발 어재 엿하고 바꾸었는데 가져간 것 얼릉 되돌려 주시유. 즈의 동상이 엿바꾼 것 옥색고무신, 아무리 엿을 판다구, 허지만 애덜한테 옥색 새 신발 바꿔가면 난 무얼 신나유?”
“워쩌긴 워쩌나유. 함께 살면 될텐디...”

이 대꾸에 신발 잃은 아가씨가 제풀에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부릅뜨고 대어들 태세이다. 동생 탓으로 신발 잃은 것도 억울했는데 함께 살자는 엿장수 넉살에 그만 닭살이 으스스 돋았다. 시골 아이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은 없더라도 엿장수한테 줄 것은 부지기수였다. 마루 밑에 쇠망치, 부엌문에 쇠고리, 대문짝에 장식머리, 댓돌위에 신발들 모두가 엿 바꿔먹을 소재들이었다. 갱엿, 물엿, 가락엿, 엿의 소재도 이렇게 다양했다.

원래 엿장수 놀이패의 정체

일제 식민지 전후의 엿장수 놀이패는 연희 가운데 상좌를 차지했다. 장꾼들로부터 호기심과 더불어 울분을 해소하며 속풀이하는 놀이패 또한 엿장수 놀이였다. 이 엿장수의 놀이 중 절정은 엿고는 집사가 엿도가 주인의 안녕과, 장판 장사꾼들의 무병장수, 그리고 장사가 잘되길 기원해 주는 일 년 중 유일한 백종놀이였다. 상모잽이를 비롯하여 열명 남짓한 남녀가 섞여 풍장을 동원했다.

상쇠·부쇠·징·장구잡이가 장판에서 원을 그리면서 풍장을 두드리면서 흥을 돋군다. 남색치마에 흰 머릿수건을 쓴 아낙이 추는 꼽추춤은 상투 머리한 두 사내가 서로 희롱하면서 벌이는 대사는 장판의 파란을 일으켰다.
‘농자는 천하지 대본’이라 쓴 대깃빨에 ‘ 우리는 엿장수’라는 중기까지 든 모습은 시골 장판의 가관이었다.

이들의 연희 주제는 장판의 발전과 엿도가의 부귀를 비는 거리 축제이다. 이 길놀이가 끝나면 뒤풀이를 했다. 좌장은 엿치기로 시끌벅쩍 한 좌중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여기 엿타령을 옮겨본다. 이 노래는 잡 타령인데 익살스럽게 부르는 노래이다. 일정한 가락도 없다. 그 지방에 부르는 노래에 얹어 부르는 민간노래이다. ‘창부타령’ 혹은 진도 아리랑에 얹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싸구려 허허 굵은 엿이란 / 정말 싸다 방울엿 / 
맛좋고 색좋고 빛깔좋고 / 사월 남풍에 꾀고리 빛 같고 / 
동지섣달 설한풍에 / 백설같이 흰엿 / 
싸구려 허허허 / 굵은 엿이란다 / 
강원도 금강산 / 일만이천봉 / 
팔만구암자 / 석달열흘 백일산제 / 
하초가리 / 더덕가리 / 
동삼가리가 / 다들어간 엿 / 
열아홉 살 큰 애기가 / 동사홀로 침을 흘린다 / 
싸구려 / 굵은 엿이란다 / 정말 싸다 방울엿 / 
이화에 / 두견울고 / 호동동 밤비올적 / 
청춘과부 / 홀로 누워 / 잠못잘 제 먹는 엿이란다 / 
가져갈 것만 가져가 / 싸구려 굵은 엿이란다 / 
정말 싸다 / 방울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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