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의 장터기행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예부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상업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오고 가는 소통의 장소로 문화창달의 랜드마크였다. 여기에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의 중간자 역할을 해왔던 보부상 역시 한국 유통업의 시작을 알린 주역으로, 오늘의 상업문화 성장에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장의 급성장으로 이 같은 전통시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에 본지는 우리의 전통시장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미래세대의 문화 전달을 위해 베스트셀러 '악어새'의 저자 이재인 소설가의 ‘왁자지껄 장터 별곡’을 새해 기획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1930년대) 군산 부영시장(공설시장) 모습 (출처=군산시)
일제강점기(1930년대) 군산 부영시장(공설시장) 모습 (출처=군산시)

 

장날의 아침은 부산해

장날 새벽은 첫 닭 울음소리에 아낙은 치마 허리끈을 조인다. 걸어서 삼십 리가 실한 읍내장을 떠나는 아침상을 어머니는 정성껏 차려야 했다. 전기밥솥, 전기밥통이 없는 그 시대였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겨울철은 청솔가지를 찍어다 꾸역꾸역 굴뚝위로 연기를 내며 무쇠 솥에 먼저 물을 데워야했다. 그 따슨 물로 밥을 짓고 식기를 씻고 또한 흥겨야 했다. 그러려면 무쇠 솥아궁이에 불을 붙여야 한다. 그러니 어머니의 마음에는 부처님 마음이 들어있다고나 할까?

어머니는 성냥을 긁어 콩깍지 쏘시개에 불을 붙인다. 아궁이에서는 버쩍 마른 쏘시게 밑불에서는 콩깍지 타는 소리가 왜놈들의 딱총소리처럼 연달아 따다닥, 따다닥 소리를 연발한다.

불빛이 비친 아낙의 얼굴이 홍옥처럼 붉다. 그런데 어머니의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인가 방언인가 뇌까리는 모습이 얼핏얼핏 비쳐 들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묵언 기도이다.

어제 아버지가 벼 두가마니를 영노다리건너 방앗간에서 정미해왔다. 그 가운데 식량을 제외하고 닷말을 장에 지게에 짊어지고 가야 팔아야 한다. 제값 받고 팔아야 했다.

엊그제 고랑밭을 계약했다. 나머지는 쌀을 내다 팔아야만 중도금을 치를 수가 있다. 농사꾼이 전답을 새로이 장만하는 일은 가문의 최대 경사이고 마을에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 쌀이 금쌀인데 상제님이 주관하사 제발 파리떼처럼 대어드는 중간상인한테 붙들려! 사탕발림에 속지 않기 하소서...

그래야만 큰 애를 장가도 보내고 젯상에 값진 기름괴기도 올릴 겝니다.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조상님덜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차, 아차 산신님이여 부엌 조앙신이시여! 

우리 냄편 쌀값 잘 챙겨주시옵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머니는 자기 죄도 아닌데 하나님에서부터 부엌 신에게까지 진정어린 기도를 했다. 어머니는 이런 기원을 하는 사이에 무쇠 밥솥에서 뿌글뿌를 밥물이 넘쳐 났다.

어머니는 날계란 깨어 소금 넣고 파, 마늘 찧어 계란찜을 마련한다. 반찬이라곤 김치 넣어 청국장을 펄펄 끓인다.

아침 동쪽에 해가 훤히 밝아오자 건넛마을 늙수그레한 곱슬머리에 옹니박이 삼촌이 기침소리와 함께 오셨다. 쌀닷 말을 얹은 지게를 형제가 먼먼 홍성장터까지 끙끙대면서 교대로 짊어지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쌀 지게를 진 형제는 형제산 음습한 골짜기를 허우허우 비틀거리면서 넘었다. 저 멀리 서울 서부역에서 장항까지 가는 장항선 철마 소리가 홍성역 근방에서 칙칙폭폭, 칙칙폭폭, 이 형제의 아침은 쇳소리가 행운이라 생각되었다.

이 때 금당리 삼거리에 다다르자 우시장을 향해가는 쇠장수가 이끄는 소의 워낭소리도 그날따라 청랑했다. 쇳소리가 귀신을 쫓는다는 민담을 형제는 생각했다. 봉사님 마누라는 하느님이 점지하듯 형은 동생이 미덥기만 했다.

황금쌀은 워디루 가능기여?

식민지 시대에는 일제가 호서지역인 서해안지방 쌀을 약탈해 가기 위해서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곤 했다. 장항선 철도가 깔리고 군산항이 군항으로 개설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군산은 약탈지의 중심항구이었다. 호남평야와 그리고 호서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황금 쌀이었다. 이 쌀은 일본 황실 내에서 손꼽히는 곡식이었다고 그들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일본에게 착취당하기 전에 충청도 내포지역의 쌀을 일 년 내내 줄곧 먹겠다는 것은 권세와 문벌을 지닌 사람만이 지닌 특권층이었다. 일반 서민한테는 그것이 과욕이요 헛된 욕망, 좀 과장하여 그림의 떡이었다.

조선시대 내포에서 생산된 쌀은 서해바다를 통하여 한강 나루터로 들어갔다. 나루 근처에 있는 광흥창(廣興倉)에 보관 시켰다. 한양의 고급관리들 녹봉으로 수입·지출되던 곳이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기되어 있다.

“충청도 쌀이 금싸라기였다고 일본인이 기록했어”

광흥창의 편제는 사령 1인(종5품)이 책임자로 부사 2명, 승 2명, 주부 2명이 지키는 관제였다. 쌀과 보리, 밀, 콩은 백성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이었다. 그래서 장시에서 쇠전(牛市場)빼곤 두 번째 고액가진 어성들이 흥청대는 곳이었다.

이 싸전에서 사들인 미두(米豆)를 대처로 팔려나갔다. 옛 50년 전에는 운송수단이 간혹 화물차에 운송되기도 했지만 7할은 말이나 소가 이끄는 마차가 유일한 운반 수단이었다. 쌀이나, 보리쌀은 당시에 아주 비싼 곡식이었다.

그러나 조, 녹두, 콩, 돔부 등 잡곡은 농부들의 가외 수입이 되는 긴요한 가용품이었다. 신발, 비누, 양잿물, 쥐 덫, 두더지 덫, 고무줄, 갖가지 물품을 사기 위해서 잡곡을 씨앗 빼고는 내다 팔아야 했다. 한해 땀흘려 지은 볏가마는 정부 헐값에 수납되었다. 

억울하지만 조세는 발등에 불씨처럼 뜨거운 감자였다. 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관청에서는 내놓고 압력을 가했던 과도기가 있었다. 이렇게 귀한 쌀은 대처에 나가있는 자식들의 자취방 식량으로 빠져나갔다. 더구나 방안 제사가 잦은 종가는 음력설쯤에는 장리쌀을 또 얻어야 하는 지겨운 삶도 있었다.

우리 어른들은 근대 일제식민지에서부터 이승만 정권이 끝날 때까지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게 소망이었던 때가 있었다. 쌀을 아끼기 위해서 무밥, 고구마밥, 시래기밥, 팥죽, 호박죽 이렇게 끼니를 때우던 우리는 불행했다.

그러나 그것이 비타민이었고 귀한 영양제였다. 역설적이게도 자연식 섞어 먹는 곡식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당시의 쌀전에 가면 큰돈의 다발에 침을 퉤퉤 뱉으면서 배추 이파리처럼 초록빛 도는 돈이 쌈지로, 고이춤 주머니로 깊숙이 들어갔다.

쌀은 식량으로 어진 백성의 목숨 줄이다. 이런 관습은 대대로 악습 되었다. 개발할 장비도 없었고 더욱이 허가권은 막강한 권력자만이 가능했다. 그러니 힘든 농투성이는 충분한 식량은 꿈처럼 아득했다.

그래서 이런 처지에 가난한 집에서는 자식들을 머슴으로, 탄광으로 보냈다. 이런 처지에 가난한 집에서 어린것들이 땅콩줄기처럼 줄줄이 생겨났다. 이들에게는 양철 양말이라도 있다면 사서 신기고 싶은 게 부모님의 심정이었다.

나무 등걸에 찢어지거나 닳아진 신발은 신기료장수한테 가서 돈을 내고 때워야 했다. 그것은 모자라는 식량을 팔아서는 감당하지 못할 당시대의 숙명적인 궁핍이었다.

“노천약전에 인삼 빼곤 다 있어”

50년 말, 60년 대 초에 장날은 으레 싸전 옆에는 금 빛 밀짚 멍석이 깔린다. 덕숭산, 오서산, 성주산, 천태산, 초롱산, 높고 낮은 비산비야에서 거두어들인 동물과 식물의 열매와 목피(木皮) 등이 서들광문 들판처럼 쫙 펼쳐진다. 대충 적어본다.

대추,은행,오미자 갈피, 계내금, 구판, 노봉방 감수, 녹각, 반묘가뢰 누고(땅강아) 선퇴(매미유충) 맹충 모려(굴) 감초, 강황, 건칠 겨누자, 결명자, 계관화, 다시마, 괴작, 메밀, 구기자, 패랑이 꽃, 부추, 곤약, 별갑, 자라등딱지, 두꺼비, 수우각(물소뿔), 영양각, 웅담, 구절초, 금낭화, 도라지, 노근, 당귀, 엉겅퀴, 자충, 태반, 굼벵이, 도마뱀, 해구신, 호골, 마늘(대산) 이렇게 많은 약재가 펼쳐진다.

돋보기안경을 쓴 꾸부정한 약종상이 지나가는 장꾼들의 얼굴을 훑는다. 힐끗 얼굴을 보면 병세를 읽는다.

“여보 이리와바유. 황달 들었는데 이거 십전대보탕 한제 먹어봐유. 그게 안 떨어지면 내가 당신네 머슴이 될텡계루. 어서와 봐유 이것 약재는 섞어 달이면 마누라 자빠뜨리는 구호 품이니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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