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조리

[중앙뉴스= 이재인] 섣달 그믐께 무렵이면 이장님이나 동네 어른들 가운데 최연장자가 되는 어른이 집집마다 대나무 복조리를 돌렸다. 그냥 나누어 주는 게 아니다. 정월보름 안에 복조리 값을 쌀이나, 팥, 콩을 현실 가격으로 쳐서 마을 이장님에게 갚았다.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이장님은 원금을 공제하고 나머지는 공동 기금에 넣었다. 이 대나무 복조리를 팔아 모은 돈은 마을의 애경사에 쓰였다. 새해 복을 복조리 가득 채우라는 의미를 지닌 까닭에 어느 누구도 거절하거나 손사래 치지 않았다.

아궁이게 불을 지필 수 없는 궁색한 집이라도 이 복조리는 다 구입하여 둘 씩, 혹은 넷 씩, 식구 숫자대로 사서 문설주 위에다 대못을 박고 X자형으로 걸어 놓는 게 정월달 세시풍속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덕도 이제 없어진지 오래다. 마을 공동 기금은 정부지원금이 대신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에게 기금이랄 것을 거둘 수가 없게 되었다. 자연히 복조리 장사는 자취를 감추었다.

복을 받을 도구는 대바구니나 멱서리가 아니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복조리는 문설주에 꿰어 달기도 좋고 간수하기도 쉬웠다. 이 복조리는 공예 솜씨가 좋은 마을 어르신을 모셔다 놓고 만들었다.

어르신들은 마을 사랑방에 모여 질 좋은 대나무를 쪼개고 엮어 복조리를 만들었다. 어르신들의 기술 솜씨에 따라 복조리 모양도 각양각색이었지만, 솜씨나 구조에 불평과 불만이 없었다. 그냥 배달된 복조리 속에는 쌀이나 조를 담았다가 집에서 먹지 않고 마을에서 걷어다가 팔거나 가난한 집 양식으로 제공되었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새해 벽두부터 이웃돕기로 선한 일을 시작했다.

복조리에 담긴 곡식은 마을 공동 항아리에 쏟아 놓는다. 이때 농부들의 사물놀이 가락이 마을에 울려 퍼졌고, 동네가 시끌벅적하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사람들은 아름드리 정자나무에 절을 하며 한 해를 기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을의 수호신 정자나무는 장작 보일러의 땔감으로 사라졌고, 복조리 장사 미덕은 그만 전설 속에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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