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예부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상업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오고 가는 소통의 장소로 문화창달의 랜드마크였다. 여기에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의 중간자 역할을 해왔던 보부상 역시 한국 유통업의 시작을 알린 주역으로, 오늘의 상업문화 성장에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장의 급성장으로 이 같은 전통시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에 본지는 우리의 전통시장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미래세대의 문화 전달을 위해 베스트셀러 '악어새'의 저자 이재인 소설가의 ‘왁자지껄 장터별곡’을 기획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사진=이재인)
(사진=이재인)

닷새 만에 서는 세밑 대목 장날은 장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금의 인구 절벽 앞에서 말한다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다. 음력설을 눈앞에 둔 장날은 어른이나 애들조차 부모를 따라 나섰다. 어린 것들의 옷, 신발, 설빔, 양말도 사야만 했다. 콩나물 자라듯 웃자란 애들의 옷이나 신발이 놀랍게도 금방 작아진다. 그러니 아이들을 동행해야 사이즈 따라 옷가지나 칫수에 따른 신발, 양말을 살 수 있었다.

거기에다 젯상에 올릴 제물도 사내들이 사들였다. 아낙들이 사들이면 제상에 조상신이 오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속설을 믿었다. 말하자면 부정을 탄다고 했다. 미신을 믿는 집에서는 섣달그믐께는 문 앞에 황토를 세 무더기, 즉 좌우에 뿌렸다. 그리고 금줄을 늘여 초상집에 들렸거나 시체를 본 사람을 제지하는 민속이 있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터부시되는 것들이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하면서 오늘의 현실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장날 건어물 전에 나가면 아이들이 먹고 싶어 침을 삼키면서 쳐다보는 생밤 까놓은 것, 건대추, 건포, 구입자가 삽교천 줄남생이처럼 꾀죄죄한 표정으로 장꾼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건포 황태루 한 마리 주시우…”
“건포 중에서 뭘로 드릴까유?”
“저놈, 아가리 벌인체 누워있는 깡태인 저 건포를…”
“예, 기다리시지요. 제물이먼 내 얼릉 손씻고 올테닝께루…”
“아니 급헌디…….”
“아무리 급헤두 바늘 허리매어 바느질은 못허니께루…"

건어물 장수가 장터가게 안집으로 주척주척 싸립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한동안 기다려도 건어물장사는 함흥차사 감감무소식이었다. 장꾼이 어글버글 시끄러운 속에서 건어물 장사를 향해 소리쳐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

그제야 건어물 장사가 슬몃슬몃 물 묻은 손을 바지허리에 쓱쓱 문질렀다. 
“아, 이 사람아 생선장사로 누굴 놀리는게여?”
“놀리기는 베락맞을 소리? 누가 으른을 놀려유?”
“그럼 자네가 놀리는 구먼 워디가서 대낮에 무슨 짓하느라구 꾸물거려?”
“그게 아니라…. 지가 어젯밤 청요리집 색주가 엉덩이 이 두손으루 만졌기에 비누질을 제대루 싹싹 문질렀지유. 지가 더러운 여자 엉덩이 만진 손으로 제물만지먼 조상귀신이 젯상으루 아니오면 워처기 헌디유? 나는 그것이 켕겨서…”
건어물은 기다리던 핫바지 차림의 사내가 낌새를 파악했는지 그제야 고맙다는 은유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천에서 태씨가 잡은 생선이 명태

올커니…저런 양심 바른 녀석이 워디서 굴러온 자슥인가?
“이 건포가 뭔지나 아시지유?”
“북어 포 아닝가?”
“천만에유….”
“그럼 북어가 아니면?”
“허허, 고종 때 한 어부가 명천 관찰사 어른께 진상헸구유. 관찰사가 젊은 어부가 인어마냥 큰 바다괴기를 잡았더랍니다. 관찰사 으른이 물었대유. ‘어디서 잡았더냐?’,‘괴기의 이름이 뭐냐?’ 그런데 누구도 모른다고 하니 그럼 누가 잡았더냐? 하였더니 어부의 성씨가 태가라 했더랍니다. 그럼 괴기 이름을 명태라 하여 명태 건포라 하옵니다.”이렇게 하여 명태 건포가 4개월간 산간 고지대에서 말려 젯상에 오르게 됐고 그 동태잡이 어부는 후일 임금으로부터 참봉벼슬이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

어디 명태뿐이런가? 생선전에는 건어물이 줄줄이 펼쳐져 있다. 건태 이름이 찐태로, 또 골태로 이런 가운데 파태 등으로 불린다. 생고기는 생태, 황태가 있다. 그리고 박대, 밴댕이, 낙지, 말린 오징어가 입맛 떨어진 겨울 장마당 장꾼들의 입맛을 돋우게 했다.

건어물 장사가 참봉의 벼슬에 임명된 사건은 진위를 떠나 진실의 승리를 보여준 교범이다. 장사하는 상인을 가리켜 한때 ‘장사치’로 낙인했던 때가 있었다. 저울을 속이고, 좋은 물건과 나쁜 물건을 섞어 팔았다. 이런 불법을 자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참봉에 이른 것은 우리 민족의 착한 성정(性情)을 제대로 발휘한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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