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박종민] 속절없이 가는 세월 속에서 올해도 어느덧 만추(晩秋)에 이르렀다. 냉랭하고 시린 하늬바람이 불어들 때마다 누렇게 빛바랜 잎새들이 스륵 스르륵 떨어져 내린다. 날려 흩어지는 낙엽을 보노라면 마음이 헛헛하고 가슴 시리다.

박종민 수필가/시인
박종민 수필가/시인

부쩍 줄어든 일조량에다 아침저녁으론 찬바람이 문풍지를 뒤흔들고 있다. 깊어져 가는 늦가을의 서정과 정취에 불현듯 어머니가 생각나고 모습이 그려지며 보고 싶다. 옻 깃을 여미며 조용히“어머니”를 뇌까려 본다. 어머니라고 하는 그 숭고한 이름 석 자가 뇌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눈과 입 그리곤 코로 흐르며 나의 온 영육을 파고든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선하고 미덥고 잔잔하면서 짜릿짜릿한 이름이 어머니다. 하지만 불러봐도 아무런 기척도 없고 대답이 없다. 나의 독백일 뿐이다. 그렇게도 애절하게 어머님을 존경하고 사모하고 사랑하는 타령이며 푸념이리라. 지난 추석날 어머니가 계신 곳엘 갔다. 야트막한 야산에 아늑하게 자리 잡아 조상님을 모신 선영이다.

어머님 영혼은 이미 33년 전에 하늘나라로 승천하셨고 한 줌의 뼛조각으로 삭아 있을 묘소다. 명절을 전후해서 효심에 찬 자식들이 누구나 다 하고 있다는 성묘(省墓)차 간 것이다. 그간 해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들러 작은 잡초 한 포기라도 얼씬하지 못하게 돌보며 잔디를 곱게 잘 가꿔내고 적절한 시기에 맞춰 깨끗하고 말끔히 벌초해 왔다.

올해도 예외 없이 계획한 일정대로 묘역의 조경수(소나무) 손질도 하고 묘비나 상석들을 닦아내고 잔디밭엔 거기에 알맞은 비료를 뿌려 주며 최선의 관리를 다했다. 마땅히 해야 할 자식 된 도리이며 소임이 아닌가.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이는 대자연의 윤회 질서에 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감을 느낄 때마다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어머님의 얼굴과 모습, 그게 ‘어머니’의 참다운 성상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며 뒤늦게 철이 나는 걸까? 때늦은 후회를 하는 걸까? 어딘지 모르게 뭔가 허전하고 마음 한구석에 허무한 생각이 드는 건 그 무엇 때문이라 할까? 인간의 마음속 깊이 똬리를 튼 본바탕 본연의 신심(身心)이리라.

30여 년 이상의 숱하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데 아직도 여전히 떠오르고 있는 어머니의 밝고 어둡고 일그러졌던 그의 여러 참모습이 비춰들며 그 존귀한 이름 석 자가 주마등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다가오고 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닌, 내 어머니뿐만이 아니리라.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자식과 어머니들이 동격이며 똑같은 모습과 위상을 지니고 있으리라.

나 젊은 시절 어느 명사가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고 느꼈던 구절이 떠 오른다. 성리학(性理學) 일환의 지침서인 명심보감이 아니면 소학에서 인용했을 것 같은 뜻깊은 문구다. 수욕정이 풍부지(樹欲靜以 風不止) 자욕양이 불부대(子欲養以 不不待)라는 글귀다. 즉, ‘나무는 고요히 버티고 있고 싶으나 바람이 그치질 아니하고 흔들고 있고, 자식은 부모에게 봉양하며 효도를 다 하고 싶어도 기다리질 아니하여 세월이 흘러 그 세월을 따라 돌아가시고 만다.’ 하는 효심 깊은 글이다.

뒤늦은 탄식의 글귀이다. 효심도 효성도 때를 맞춰 행하라는 아포리즘이다. 자식의 때늦은 후회와 탄식이 무슨 쇼용이 있으랴! 아무리 차원이 높은 윤리와 도덕도 살아 있는 생존 시에만 유지되는 게 보편적 인륜이리라. 이처럼 위에 언급한 술어는 과연 인간 존재에 따른 본질 및 구조 이론 등 인간 본연의 생명론(生命論)을 설파하는 멋진 문구가 아닌가 싶다.

돌아보니 나의 어머님도 그랬다. 자식인 내가 느지막이 깨닫고 효도를 하려 했지만, 어머님은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셨다. 맑은 날 궂은 날,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질 않고 오직 자식 사랑 새끼 사랑에 일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고단하고 곤궁한 어머님의 삶이었고 생애이었다.

자식들의 미래를 만들어낸 모태가 아닌가. 모성애다. ‘어머니’란 그 이름이 모성애요 삶에 짓눌린 무게와 성상이다. 어머니, 어무이, 오마니, 엄니, 엄마, 이 땅의 자식들이 누구나 불러보는 이름. 실로 숭고하고 살갑고 정겹고 부드러운 이름이다. 그리움이다. 보고픔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